brunch

매거진 단편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jury time Dec 13. 2023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

신음 : 병이나 고통으로 앓은 소리를 냄

오가는 차량 하나 없는 한산한 교차로에 선생님과 제가 탄 차는 조용히 신호대기에 걸려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선생님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더니 호흡을 가다듬고는,

'소년이 된 듯한 기분'이라며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 흡


그 순간,  클리토리스가  팅, 튕겨지며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이 삐죽 새어 나왔어요.


이제 막 늙기 시작한 남자의 떨리는 진심은 불시에  깊은 곳에 숨어있던 작은 진주알을 건드린 것 같았습니다. 그는 분명 의도하지 않고 순수하게 본인의 진심 어린 소회를 말했던 것 같은데 거기에 제 몸이 반응하다니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그분은 제 짧은 신음을 들었을까요?

어학사전에 '신음'을 검색하니 병이나 고통으로 앓는 소리를 냄이라고 쓰여있는데, 혹시 제가 순간적으로 어떤 중병에 걸렸을까요?


얼마나 어이없던지, 당황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저는 팔짱을 낀 채 아무 일 아닌 듯 어두운 차 창밖만 바라보았어요. 날이 찬 것도 아닌데 차 안은 금세 새하얀 김이 서려 올라오고 있었어요. 팔짱 끼고 있는 제 손목 아래로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습니다.


섣불리 식사자리를 만든 건 아닌지 후회가 되었어요. 작은 호기심으로 시작한 저녁 식사가 이런 감정사고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가볍게 식사하면서 그의 단란하고 안정적인 삶 이야기나 들을까 했던 제 철없는 욕심이 그를 앓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급성 심장병이라도 걸린 듯 그는 한동안 심장에 손을 얹은 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폰을 열어 아무거나 짚이 대로 Say It To Me Now 영화음악 켰습니다.  바람 부는 황량한 밤, 거리 귀퉁이에서 목놓아 부르는 글렌 노래.

그때서야 그소년시절에서 깨어난 듯 다시 초로의 남자로 돌아와 능숙하게 리어버튼을 눌러 하얗올라오는 김서림을 빠르게 지워나갔습니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걸 동경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10년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옆에만 있던 J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 제게는 없는, 앞으로도 절대 닿을 수 없는 안정감과 품격이 그에게는 있었고,

게다가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기에 나이차이 많이 나는 유럽의 어느 담백한 지인관계처럼  멋지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제 신음을 듣지 못한 것 같았어요. 그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지금의 무기력함을 귀 끝을 붉히면서 토로하기도 하고, 젊고 늙은 서로에게 시답잖은 조언도 주고받으며 그렇게,  우린 자주  만나서 집 근처 앞산에도 올라가고,  852 카페도 가고, 고양이 병원도 같이 데려가 주고 하면서 가볍고 가까운 레옹과 마틸다 같은 사이가 되어 갔습니다.


가끔 엘베에서 그와 그의 아내가 함께 탈 때면 그냥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하고는 서둘러 폰을 꺼내 든다는 게 달라질 뿐. 그렇게 인사 잘하던 그도 언젠가부터는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조용히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숫자에만 집중할 뿐이었죠.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와 저는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J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는 제게 소중한 소울-메이트였습니다. 한동안은.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