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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Jan 21. 2024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5.

예쁜 애의 발칙하고 유혹적인 제안



나는 이제 매일매일 그 애를 안고 싶어졌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밤새 누비이불을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끼고 선잠을 잔다. 잠에서 깨면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침마다 내 낡은 파자마의 아랫도리가 먼저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누가 볼까 무서웠지만 모든 게 신기했다. 이렇게 아침마다 탱탱하게 살아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5시에 일이 끝나면 그 애의 직장 근처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그 아이를 만나 그 아이의 취향에 맞는 마라탕으로 저녁을 먹고, 내 생전 맛보지 않았던 정향 냄새가 지독한 뱅쇼를 호로록 달달한 척 마셨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모든 걸 무조건 그 애의 취향에 맞췄고, 무조건적으로 공감하려고 했고, 그게 뿌듯했고,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다. 내 남은 생에 마지막 여자라는 생각에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아이를 위해 애를 썼다.

눈을 뜨면 그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하루를 시작했다. 안부가 궁금했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그 애를 매일매일 안고 싶었다. 그동안 나의 삶은 무력하고 지친 몸으로 아내가 사다 논 텁텁한 견과류나 씹으며 책이나 보고, 느리게 하릴없이 산책을 다녔었다. 지금은 동화 속 젊어지는 샘물이라도 마신 듯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났다.




- 선생님이 주무신다는 서재방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어느 날, 예쁜 애는 발칙하고 유혹적인 제안을 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차츰 아이를 들이는 날을 상상했고, 설레었다. 마침 와이프가 학원장 워크숍에 가던 날, 나는 큰 그림을 그리며 작은 서재방으로 그 아이를 들였다.

오가는 주민들의 발걸음이 잠잠해진 밤 11시쯤을 틈타, 나는 현관 발말굽을 내려 한 뼘 정도 문을 열어놓고 그 애를 기다렸다. 주방 작은 초록색 조명 하나만 켜놓고 집안의 불을 모두 소등한 채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아이가 들어왔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가 꺼졌다. 하얀 맨발에 딸기색 발톱색을 칠한 예쁜 애는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드디어 내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두 팔 벌려 아이를 맞이하고 품에 안았다. 품 안에 아이가 쏙 들어와 안겼다. 아이 목에서는 이제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듯 시원한 비누냄새가 났다.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 왜 불을 다 끄고 계셔요?      


아이가 몸을 비틀며 내 품을 빠져나갔다. 손가락 두 개로 잡고 있던 잠자리를 하늘로 날려 보낸 어린 소년처럼 나는 애태우며 그녀를 품에서 내어주었다. 흑빛으로 새까만 머리카락 한 줌을 귀옆으로 넘기며 아이는 어두운 집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한 초록색 불빛에 아이의 귓바퀴가 유난히 하얗고 반지르르 빛이 났다. 굳이 불을 켜자는 얘기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나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수도승의 방 같은 작은 서재방 문을 빼꼼히 열었다.

    



작가님, 오래간만이에요. 아니, 이제는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혼란스러워요. 작가님이 저희 집 바로 아래에 살고 계시는 저의 선생님이었다뇨.

어쩌다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J처럼 선생님은 저를 떠나지도, 저를 옭아매며 뭘 바라지 않을 것 같아 당신을 편히 제 옆에 두고 싶었다면 이해하실 런지요. 아마 제가 J를 옭아매며 뭘 자꾸 바랬기에 그가 저를 떠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인연이란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아지기가 힘든가 봐요.


선생님과 자주 만나면서 이상하게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목소리, 말투, 간간히 내뱉은 잔잔했던 선생님의 삶까지. 브런치 작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디서 많이 느꼈던 그 관심. 그 태도. 주고받는 메시지 속 내가 알던 작가님 다운 그 글투. 깨알 같은 추억을 나눴던 댓글 속 작가님이 선생님과 닮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세상이 이렇게 좁다뇨.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고 만나고, 얽히고 그러다뇨.


선생님은 자주 청년시절에 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며 헛된 상상을 하곤 했죠. 어쩌면 우리는 몇십 년 전 그때 그 거리에서 마주쳤을지도 몰라요. 우연인지 아닌지, 선생님이 첫 직장으로 다녔던 그 저의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린 시절 제가 시소를 타고, 비눗방울을 불던 추억과 겹치는 걸 보면 신기하고 놀라워요. 길가의 작은 돌멩이 안에 숨겨진 작은 우주 안에, 그 안에 지구에, 그 안에 우리가 만난 기적과도 같은 인연이 아닐지요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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