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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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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Jan 24. 2024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6.

편백나무 베개 두개


그리고 저는 그날, 확실히 깨달았어요.


선생님의 서재에 들어갔던 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창을 마주 보고 자리 잡은 붉은빛 월럿 책상. 세상 편해 보이는 회전의자가 비스듬히 창쪽을 향해 놓여 있고, 길게 목을 뺀 유니크한 디자인의 스탠드.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손때 묻은 오래된 만화책. 작가님의 성품을 닮은 책들은 종류대로 1권부터 차례대로 보기 좋게 꽂아 있고, 묵직해서 더더 고급져 보이는 미술 화보집에, 인문교양서와 고전소설집들...

제가 알던 작가님의 취향과 잘 어울리는 파릇한 올리브 나무와 테이블 야자는 관리를 잘 받았는지 빛바랜 잎사귀 하나 없이 푸르게 윤기 나고, 책상 위에 올려진 라탄 디퓨저에서는 백만 년 전 메타세쿼이아 숲에서 뿜어 나올법한 피톤치드 향이 은은했지요. 그리고 그때,


제가 알던 브런치 작가가 선생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챘어요. 테이블 야자 화분 뒤에 꽂아져 있던 그 책.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단행본. 제가 브런치를 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이잖아요. 발행부수 겨우 300부를 찍고 조용히 사라진 그 책. 제가 8년 전 작기님께 사인까지 해서 우편으로 보내주었던 그 책. 그 책이 선생님의 방 책꽂이에 꽂혀있는 걸 발견한 순간. 눈앞이 하얘지더라고요. 얼마나 놀랐던지요. 선생님이 그 작가님이라는 사실.

왜 말하지 않으셨나요?

예쁜 애야, 내가 바로 매일 밤 나에게 일기 쓰던 그 브런치 작가란다.

왜 말하지 않으셨나요?

전 마치 애인에게 비밀 일기장을 들킨 듯. 눈앞이 깜깜해졌어요. 부끄럽고 당황했어요. 사람들은 자기만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사실. 물론 작가님께 보내는 일기였지만 영원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남길 바랬는데. 전 발가벗겨졌어요.


그리고, 사모님이 갑자기 돌아오셔서 서둘러 몰래 집을 빠져나오던 중 들었던 두 분의 대화.  

- 여보, 뭐 하느라고 집에 불을 이렇게 다 꺼놓고 있어요? 식사는 하셨고? 이봐요, 이거 뒤에 지퍼 좀  내려줘.
- 뭔... 갑자기 무슨 일인데 한밤중에 돌아왔어?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커다란 가족사진도 걸려있고, 곳곳에 작은 액자 안에 선생님과 아내와 아들 사진이 깔깔거리고 있는 걸 보았지 뭡니까. 두려움이 밀려왔어요. 저야 홀가분한 사람이니까 죄책감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제가 저를 인정하지 못하겠고, 이제는 선생님도 더 이상 멋지지 않아요. 그저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거짓말쟁이, 바람둥이에 불과해요. 집주인이 돌아오니 서둘러 숨어버리는 쥐새끼처럼 저는 그렇게 어둠을 틈타 도망쳤어요.


이제 진심을 말해야겠어요.

거짓말로 쓰는 일기가 아니라 진심이에요.

그동안 선생님의 배려에 감사함을 느끼며 여기까지가 끝인가 봐요.

선생님. 아내에게 돌아가세요. 저도 그를 찾으려 합니다.

30년 동안 지켰던 가정, 끝까지 책임지는 게 맞아요.

그냥 우리 각자 외롭게, 쓸쓸히 남은 생을 살아가요.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어릴 적 스쳐 지나갔던 날처럼 마주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동안 맛없는 마라탕이랑 뱅쇼 드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 일기장은 접을 거예요. 이만. 총총.




- 여보, 현관 센서등이 나갔나 봐. 나 왔어요~


예쁜 애가 방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와이프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투덜거리며 안방으로 먼저 들어가 원피스의 뒷지퍼를 잡고 야단이었다. 나는 얼른 아내를 따라 안방 문을 닫고 들어가 아내의 원피스 뒷 지퍼를 내려주며 마음을 졸였다.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아내에게 괜한 말을 붙여본다.


- 여보, 뭐 하느라고 집에 불을 이렇게 다 꺼놓고 있어요? 식사는 하셨고? 이봐요, 이거 뒤에 지퍼 좀  내려줘.
- 뭔 일인데 한밤중에 돌아왔어?
- 아니, 그러니까.... 참석한 원장들하고 마음 안 맞아서 우리 팀끼리 빠져나와 술 한잔하고 헤어졌지. 무식한 원장년들. 근데 현관 센서등이 나간 것 같아.
- 어, 그래? 그랬구나...


예쁜 애가 내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무의식 중에 신발을 신발장 밑으로 밀어 넣어놨다. 다행히 센서등도 나가 와이프는 그 애의 낯선 슬리퍼를 보지 못했다. 천운이다.


그렇게 예쁜 애가 내 집에 온 일은 거짓말처럼 지워졌고, 예쁜 애는 없어졌다.

그 아이는 개정을 바꿨는지 더 이상 내가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브런치에서도 탈퇴하고 메시지에도 반응이 없다. 퇴근 후 그 애의 직장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속에 예쁜 애는 없었고, 전화는 차단을 했는지 받지 않았으며, 아파트 주변, 주차장과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주치지 않고 내 눈에서 사라졌다.

내 집에 왔던 그날 예쁜 애의 발톱 색깔 같은 딸기를 오도독 씹으면서 쓸쓸한 여름을 맞이했고, 예쁜 애의 풍만한 젖살 냄새를 그리며 와이프를 안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와이프는 서재방의 누비이불을 치우고 안방 침대에 내가 좋아하는 편백나무 베개를 나란히 두 개 올려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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