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해설가 계약기간이 끝나고 나는 한동안 하모니카와 드럼을 배우겠다며 문화센터를 전전했다. 하지만 특별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주 수업을 빼먹으며 석 달 만에 더 이상 다니지 않고 폐인처럼 게으르고 나태하게 집안에서만 지내는 날이 많았다. 예쁜 애를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아무렇지 않게 무덤덤하게 생활했지만 실상은 아무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자주 예쁜 애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허우적거렸다.
나에게 마지막 일기를 쓴 몇 달 후 그 아이는 이사를 간 것 같다. 아이의 집 베란다 쪽에 사다리차가 세워지던 날 아이는 떠났다.
며칠 후 아파트 내 노인정 앞, 해가 잘 드는 처마 밑에 그 아이와 사랑을 나눴던 파란색 좁은 패브릭 소파가 밖에 버려져있는 걸 발견하던 날, 어느 늙은 부부가 해를 쬐며 그 소파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서 땅콩을 까먹는 모습을 보니 울컥하며 예쁜 애가 미치도록 그리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처럼, 정말 그 아이와 내가 사랑했었는지, 가물가물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자주 꿈속에서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가 새벽에 깨서 잠을 설쳤다.
그 아이와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다 만난 시냇물 줄기 같은 사이였던 것 같다. 각자 어느 산기슭에서 빗줄기로 내려와 흘러 흘러, 돌고 돌아, 어쩌다 바위와 작은 돌멩이로 쌓인 작은 소용돌이에서 만나 잠시 고여 있다가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시냇물 줄기처럼 우리는 그렇게 잠시 만났다가 어느새 다시 각자의 길을 찾아 흘러가는 중이다.
아들은 몇 해 후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리고 손주를 보고 나는 드디어 진짜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정말 노인이 되어가는지 손등부터 머릿속에까지 검버섯이 올라왔고, 내 몸의 모든 피부는 늘어지고 주름져가고 버석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를 만나면서 미친 듯이 운동을 하던 습관은 이제 숨쉬기 운동으로 대신하고 늘 우두커니 경로우대카드로 무임승차 여행을 하며 여기저기 느리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욕망으로 똘똘 뭉쳐 이일 저일 저지르던 아내는 이제 칠 학년을 두 해 남기고서야 모든 걸 접고 손주를 본다며 아들 내외 집으로 들어갔다.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를 대신해서 이제 돌 지난 손주를 프리미엄 디럭스 유모차에 태우고 문화센터 수업을 다양하게 섭렵하며 다시 한번 아내는 조기교육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느리게,
병원 투어를 하며 하루를 보내곤 한다.
아내가 떠난 후 나는 더욱 게으르게 시간을 보냈다. 6인용 식탁에는 정리하지 않고 쌓아놓은 세간살이들과 공과금 고지서들, 약봉지들이 수북했다. 뭐든 눈앞에 두지 않으면 물건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내 정신은 흐려져갔다. 작년부터는 혈압약을 먹었고, 올해부터는 고지혈증 약도 처방받았다. 매일 한 주먹씩 목구멍으로 약을 털어 넣었지만 내 늙은 몸은 좀체 가뿐해지지 않았다. 만사가 귀찮고 지쳐서 몸뚱이를 씻는 것조차 미루며 매일매일 하릴없이 살았다.
눈이 침침하고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지던 날, 안과에 갔더니 오른쪽 눈에 백내장이 왔다고 했다. 며칠 후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여 혼자 백내장 수술을 받고 오던 날,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 위로 비행기가 뱃살을 하얗게 내보이며 나의 휑한 정수리 위로 지나갔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안을 정리하고 간단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가다가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쓰러져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가는 게 무서울수록 그 옛날, 나의 예쁜 애가 그리웠다.
러시아, 러시아로 가야겠다. 예쁜 애의 J가 떠났다는 러시아로 가야겠다. 생전 해외생활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만약 이 도시를 떠난다면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로 가야겠다. 나에게 가장 멀고도 먼 곳이라고 생각하는 그곳. 예쁜 애의 J가 떠났다는 그놈의 러시아.
몇 달 후,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북부 상트페테르부르크 구석의 작은 골목에서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부터 날아오는 구름과 바람과 공기가 나를 밀어 올리는 것 같아 그나마 숨도 쉬어지고, 하루하루 죽지 않고 있다. 턱수염과 코털과 귀털들이 제멋대로 자라 나오는 통에 나의 몸은 거칠고 희끗희끗한 털로 온통 덮여버렸다. 손발톱은 언젠가부터 돌덩이처럼 울퉁불퉁 두꺼워지고 메마르고 갈라져 피가 터져 흐른다.
늘 회색빛 구름이 가득 차 하늘을 가리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더듬거리며 돌담을 짚고 있다. 드넓은 대륙의 작은 작은 마을, 작은 골목 한 귀퉁이에 어깨를 기대고 있어도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을 이곳에서 나는 마지막을 살기로 했다. 아무도 없으니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가벼워서 이곳이 더없이 편하다.
올 때 아무것도 없이 이 땅에 온 것처럼 나는 이제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고 떠나려 한다. 아무것도 없던 손을 왜 그토록 놓치지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꼭 쥐고 있었는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악착같이 꼭 쥐고 있던 주먹을 이제야 펴본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이 비릿한 냄새만 가득했다.
나는 점점 흐릿한 회색 눈동자로 미술관과 성당을 잇는 판판하고, 단단한 돌계단 골목들을 한발 한발 내딛으며 오랜만에 떠오른 저 끝 뜨거운 태양을 향해 오른다. 예쁜 애의 깊고 좁고 따듯한 그곳을 향해.
돌계단 위 작은 식료품 상점 앞에 예쁜 애와 그 옆에 예쁜 아이가 소곤거리며 앉아있다. 통통한 이마에 까맣고 탐스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앉아있는 나의 예쁜 애. 그리고 그 옆에 예쁜 애 손을 꼬옥 잡고 앉아 있는 나를 닮은 듯, 그녀를 닮은 작고 어리고 예쁜 아이가 낡은 파란색 패브릭 소파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