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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1. 2024
부금 4백만 원 사건의 전말 5
그녀의 뜨거웠던 사정
제법 큰 규모의 대학교 생명과학교수로 있던 박여사의 남편은 세계 최초 인공초유를 개발한 장본인이다. 그의 인공초유는 아직 시중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꽤 인정받은 성과를 이루었다. 이 인공초유는 고체 단백질과 생장인자 분비형 면역글로블린 A, 인공 락토페린 성분을 나노리터까지 쪼개서 배합하여 산모에게 나오는 유즙과 동일한 상태, 아니 그 이상의 영양성분을 뽑아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인공초유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박 여사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박 여사는 남편이 떠난 후 이 집 지하 연구실에 남겨진 인공배합기에서 추출한 이 초유를 매일 마시고 몸에 바르며 남편을 그리워했다.
박 여사는 목욕 후 뽀송하게 마른 블라우스와 발목까지 오는 오간자 롱스커트를 입고 집안을 둘러본다. 티끌하나 없이 집안은 끊임없이 소독하고 살균한다. 그야말로 무균실처럼 반들반들하다.
박 여사는 하루종일 금고에서 꺼낸 종이돈을 스팀다리미로 다려서 쌓아 놓는 소일거리를 한다. 평생 은행 업무 같은 건 할 줄도, 볼 줄도 모르는 박 여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금고에 있는 종이돈으로만 생활하고 있었다. 순남이 슬쩍 훔쳐보니 금고 속 오랫동안 묵은 종이돈은 바짝 말라 화석처럼 보였다. 박 여사는 무광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보사노바를 하루 종일 들으며 종이 돈 뭉치를 꺼내 먼지를 털고 다림질을 했다. 그녀 옆에는 늘 와인 잔에 인공초유가 가득 따라져 있었다.
가끔 다림질 한 뜨끈뜨끈한 오만 원 권을 인심 쓰듯 순남에게 건네주며 박 여사는 장을 보게 하거나 공과금을 내게 한다. 소독약과 살균스프레이 이런 것들이나 사든지, 수십만 원 나오는 난방비를 내는데 종이돈은 쓰인다. 밖에서 들어오는 돈은 절대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되기에 순남은 어떻게든 박 여사가 주는 돈을 다 쓰고 들어갔다.
비릿한 종이돈 냄새가 다리미의 스팀에 배어 온 집안에 가득 찼다. 그 사이 발그레하게 얼굴에 생기가 돈 박 여사는 스팀다리미 온도를 최고로 올려 칙칙 뜨거운 소리를 냈다. 종이돈이 뜨겁게 반듯해지면 비로소 그 오만 원 권은 돈이 아닌 박 여사의 꽃잎이 되어 쌓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순남도 박 여사가 그저 깐깐한 늙은 결벽증 환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집 일을 하며 일주일째 그녀를 지켜보니 그게 아니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겨서인지 박 여사는 하루가 다르게 낯빛이 좋아지고 생기가 돌았다. 광대뼈가 들어가고 눈꺼풀을 덮은 눈두덩이는 어느새 탄력 있게 올라붙어 두 눈은 또렷하게 보였다.
순남이 슬쩍 오만 원 권 꽃잎을 숨기기라도 할라치면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순남은 박 여사의 비위를 맞춰 스팀다리미의 물이나 채워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자식 없이 지내는 박 여사의 비위만 맞추면 장보고 남은 돈을 슬쩍 할 수도 있고, 넉넉히 월급도 주니 순남에게 이 일은 다디단 꿀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손목을 다쳤다던 메이드도 다른 곳으로 가버린 이후로 순남은 이 집에서 24시간 묵고 있었다.
- 우리 교수님이 말이야, 내 앞으로 연금도 부었단 말이지. 그 돈이 나올 때가 됐는데, 통장이 어디 있더라..
어느 날, 잊었던 기억이 났는지 박 여사는 금고 속을 모조리 뒤져 통장과 보석과 종이돈을 꺼내 하나하나 살펴본 일이 있었다. 박 여사의 낡은 은행 통장들과 서류들이 쏟아져 나왔다.
- 우리 교수님, 평생 나밖에 몰랐지. 아, 왜 나만 두고 먼저 가셨을까? 은행가서 통장내역 좀 보고 와. 비밀번호는 우리 집 번지수야.
박 여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통장 몇 개를 펼쳐 보다 순남에게 휙 던져준다. 색이 바랜 낡은 통장을 들고 순남은 은행으로 향했다. 오래된 통장 몇 개는 휴먼 거래정지 되어 창구로 가라는 안내 문구만 나왔고, 그나마 남은 통장은 비밀번호가 오류라며 통장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간 거래내역을 살펴보니 잔잔하게 남은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 통장 하나는 수억이 들어있기도 했다. 순남은 동그라미를 세느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