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우유 속 사정
대추나무에 대추가 붉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대추나무 너머로 오래된 목조주택, 향나무로 내부 기둥을 쌓은 너른 거실에는 오래된 패브릭 소파가 주인 행세를 하고 앉아 있다. 정원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실창. 레이스와 공단 두 겹 커튼은 그 집의 호위무사처럼 창문 양 쪽에 버티고 있고, 정원의 석상 서너 개가 그 목조주택을 지키고 있다.
물고기 모양의 황동 도어벨에서 영롱한 소리를 내며 순남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창 앞 일인용 소파에 온몸을 맡긴 늙은 이 집의 주인 박 여사가 고개를 들었다.
유난히 윤기 나는 백모를 한 박 여사는 반짝이는 은사가 드문드문 수놓아져 있는 연분홍색 스웨터를 어깨에 두르고 앉아 순남을 아래위로 훑어본다. 박 여사의 콧날에 콕 박혀있는 까만 점이 더없이 우아하게 반지르르하다. 순남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거실 초입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박 여사는 순남에게 까딱까딱 손짓을 하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하고 다시 창밖으로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지난 주부터 길태의 어미 장순남은 집에서 다섯 정거장 거리의 대추나무집 메이드 일을 다닌다. 원래부터 하던 메이드가 손목을 다쳐서 한 달간 대신해서 이 일을 맡았다. 순남은 메이드 일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늙은 집주인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피라미드 사업에 한몫 투자를 받을 예정이다. 하지만 늙은 박 여사는 순남에게 도통 곁을 두지 않고, 매번 올 때마다 문 앞에 한 참을 서있게 하며 눈수색을 했다.
어렵사리 집안으로 들어와 마주한 주인여자는 생각보다는 좋아 보였다. 순남은 약간 안도했다. 주인여자가 한때 잘 나가는 무용수였는데 지금은 노환으로 팔다리 관절이 다 닳아져서 자유롭게 생활하지 못한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늙어뵈기는 했지만 보행보조기를 끌고 집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으니 순남의 손품을 덜어줄 거라 생각했다.
새장 속 귀하게 살던 박 여사가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건 2년 전이었다. 갑작스런 암 판정으로 박 여사의 남편은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병환 중에 혼자가 된 박 여사도 어느덧 알츠하이머가 조금씩 찾아왔지만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남편을 잃은 박 여사는 점점 예민해지고, 어린 아이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 아주머니, 돌돌이로 여기 좀 밀어. 여기도, 저기도. 이 먼저 좀 봐.
주인 여자가 결벽증이 있다던 귀띔이 있었지만 그녀의 예상보다 더 주인 여자는 깐깐한 사람이었다. 메이드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던 박 여사는 그 사이 먼지가 말도 못하게 쌓였다며 하루 종일 순남에게 집안 청소를 시키며 들들 볶았다. 순남은 주인 여자의 등살에 하는 수 없이 종종거리며 마룻바닥 틈 사이사이를 꼼꼼히 닦아야 했고, 방 문고리와 냉장고 손잡이, 여러 개의 리모컨을 살균 소독 하고, 펄펄 끓는 물로 과탄산수소를 녹여 화장실 청소를 하고, 돌돌이로 여기 저기 밀고 다녀야했다.
그것뿐 아니었다. 순남에게 청소나 소독보다도 더욱 기운 빠지는 일이 있었다. 박 여사를 부축해서 매일 아침 우유 반신욕을 시키는 일이다. 남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걸 수치스러워 해서 아무나 박 여사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 며칠 버티다가 결국에는 순남에게 몸을 맡긴 박 여사다. 박 여사가 번번이 날카롭게 순남에게 지시를 하는 통에 욕실은 매번 박 여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반신욕 순서는 철저했다. 우선 반짝반짝 닦은 욕조에 40도의 물로 욕조에 채운다. 박 여사는 보드라운 실크 가운을 입은 채 순남에 의해 욕조에 앉혀지고 그제야 박 여사는 따듯하게 끓인 1L짜리 20팩의 더운 우유로 가슴을 적시며 가운을 벗는다. 뼈만 남은 앙상한 팔다리의 하얀 거죽이 우유와 함께 반짝이며 보아뱀의 가죽처럼 일렁인다. 검버섯 하나 없는 팔목에는 4부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팔찌가 달랑이고, 박 여사의 우윳빛 진주알 반지 두 개가 욕조 속에서 보였다 말았다 한다. 박 여사는 우유 욕조 속에서 한참 동안 그 진주알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시간을 보내다가 매끄러운 모습으로 순남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일어났다. 우유 목욕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그녀의 살결은 더욱 희어지고 수분을 머금은 볼 살은 더할 나위 없이 발그레해지고, 살집 없던 배꼽 아래 둔덕과 젖가슴도 통통해지는 것 같다.
- 우리 교수님이 살아있을 때 나를 얼마나 아꼈는지 몰라. 이 우유가 말이야, 그냥 우유가 아니야.
그러고 보니 박 여사가 매일 아침 목욕에 쓰이는 우유는 순남이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신비한 향이 났다. 하얗고 노란빛의 우유는 처음 맡을 때는 시큼했으나 점점 꼬순내가 은은하게 느껴졌고, 손으로 몇 번 비비면 꾸덕해지며 크림 같은 촉감으로 변했다. 이 우유를 박 여사는 하루 종일 끓여 먹고, 달여 먹고, 온몸에 발라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