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프 녀석
일을 하다 보니 새로운 세상이 여기에도 있었다.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봉사 점수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내 생전 봉사란 학생 때 급식 봉사가 다였었는데, 물론 학급 임원이 되면 저절로 따라오는 봉사점수가 있었지만 나로선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의외로 봉사활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았다. 수시로 문의 전화가 오고, 재능기부 하겠다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앞장서서 뭔가를 주도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우리나라에는 E성향이 참으로 많다.
생각보다 피곤한 그 일들에 사람들은 항공 마일리지라도 쌓인 듯 열성적이었다. 봉사는 그들에게 스펙이거나 명예였다. 젊은 층은 취업 목적으로 봉사점수를 모았고, 또 다른 그들은 명예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금전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는, 잃을 게 많아 뵈는, 이른바 기득권들이었다. 사회에서 한가닥하는 그들은 열심히 돌아다니며 포켓몬스터 게임 레벨을 올리듯 서로 경쟁적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봉사 활동하는 회원 중에 올해의 봉사상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이 동네 가장 큰 식자재마트 여사장 황상미 여사다. 황상미 여사는 어린이 안전 지킴이 봉사부터 요양원 식자재 기부와 한강천 환경보호캠페인, 김치 나눔 행사, 쓰레기집 치우기 등에 참가하여 괄목할 만한 봉사 정신으로 여기 성동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지역유지라고 소개했다.
황상미 여사가 봉사상을 시상하던 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도대체가 일반인은 입기 힘든 반짝이가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의상으로 연예인급 치장을 하고 수상을 하더니, 포토존에서 상패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참 인상적인 세상이었다.
일이 끝난 후에는 다섯 정거장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갔다. 목적지가 있는 도보는 목표가 분명해서 걸을 때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 저절로 씩씩해진다. 한껏 가벼운 가슴으로 나만의 집으로 돌아간다.
검정 비닐봉지에 오뚜기 3분 카레와 레쓰비 마일드 커피 두 캔, 귤 한 바구니를 사들고 왔다. 그 봉사상을 받은 황여사의 식자재마트에서.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나의 식사 루틴은 오뚜기 3분 카레와 레쓰비다. 언제든 간편하게 배를 채울 수 있고, 가격 대비 가성비가 좋다. 밥은 냉동실에 쌓아놓고 먹으니 생활비가 절감된다.
오늘은 계산대 앞에서 ‘나를 가지세요~’ 하고 반들반들 웃고 있는 귤 한 바구니를 사버렸다. 불필요한 지출이다. 하지만 괜찮다. 노랗고 반들거리는 귤은 추억이다. 귤을 까먹으며 지냈던 지난한 시간들이 생각났었다. 비록 고양잇과 인간이라고 해도 그들끼리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난들 아련한 추억 하나 없으랴. 어쨌든 나는 그것들을 사들고 흔들흔들 아파트 앞에 다다랐다. 내게 추억이란 고만고만한 나의 고독한 하루를 기꺼이 즐기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했다.
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보폭을 두 배로 뛰다시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비는 어느새 굵은 빗줄기를 만들고, 금세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띡딕띠띠띠띠 또르륵
밑창이 닳아 반들반들 해진 운동화 한 짝을 뒤집어 벗으며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를 맞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한동안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어느새 천둥번개와 세찬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던 길에 확인했던 호우주의보 알림이 생각났다. 나는 살짝 열어놓았던 베란다 창문 생각에 얼른 몸을 일으켜 우리 집 유일한 창문을 닫으러 베란다로 다가갔다.
아옹.... 아옹.... 아옹
애처롭고, 앙칼진 고양이 울음소리. 나는 세찬 비를 가르며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내리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5층 베란다 샤시에 끼어 있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였다. 나는 너무 놀라 앞뒤 생각도 없이 샤시 사이에서 발버둥 치는 녀석을 꺼내 들었다. 깡마르고 사나운 녀석은 지를 구해준 나에게 하악질을 하며 한없이 울어댔다. 얼마나 거기 그렇게 끼어서 발버둥을 쳤는지 울부짖은 녀석의 목소리는 쉬어서 제대로 성질을 부릴 힘도 없어 보였다. 대체 아파트 5층까지 어떻게 올라왔다가 그렇게 베란다 샤시에 끼어버린 건지. 나는 타월을 가져와 아이를 닦아주고, 따듯한 우유를 좀 먹이고, 보온매트 위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아기는 금세 서러움을 잊고 깨방정을 부리다가 잠이 들었다.
저 녀석을 어떻게 해얄까.
분명 녀석은 길 위에서 5층 베란다로 올라왔거나 윗집에서 내려왔다. 예고되지 않은 감정 소모였지만 나는 녀석을 그레이프라고 이름 짓고 한번 데리고 살아보기로 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 나오는 길버트의 동생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위험한 급수탑에 오르려던 것처럼 아파트 벽을 오르내리는 게 천지 분간 못 하고 해맑기만 했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