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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라이블리 Nov 27. 2021

난소암? 자궁내막증? 저는 이제.. 생각하기가 싫어요.

내 진료는 환자분들을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알아가는 과정일 때가 많다. 




30대 중반의 여자 환자분이었다.


살짝 통통한 몸집, 수더분한 차림새, 서글서글한 표정.

하지만 어딘가 위축된 느낌이 있었다.


겉보기엔 분명 밝고 목소리도 명랑한데,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 느낌.



사실 이분은 지난달 예약을 잡으셔야 했던 분이었다.

보통 그 달의 진료 신청을 받으면 1주일내로 다음 달 진료 예약이 마감된다. 


그런데 이분은 소식이 없으셨다가 홀연히 다음달이 아니라 다다음달에 예약을 하고 나타나셨다.



사람 대하는 일을 업으로 삼다 보면, 

사람을 파악하는 안테나가 발달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런 사소한 일들이 우연인지 그 사람의 특징인지를 구별하게 된다.



그분과 대화를 해본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분이 늦게 예약을 하신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이쯤에서 이분의 진료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 한다.


이분이 오시기 전 작성해주신 설문지를 토대로 이미 환자분에 대한 파악은 해놓은 상태였지만,

나는 항상 그 병력을 환자분과 함께 되짚는다. 


함께 파악을 해나가다보면, 

빠진 부분이 생각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단서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삶을 조금 더 맥락있게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난소암으로 수술과 항암을 거친 분이셨다. 

20대에 발병한 난소암, 출산,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자궁내막증.

이로 인해 약을 드시고 있기도 했고, 이외에도 다양한 문제들을 참 많이 가지고 계셨다. 


하나도 피로하지 않은게 1,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게 10이라고 했을 때 8점을 주실 만큼 피로했고, 체력 저하를 느끼고 계셨고, 스트레스도 많고, 다른 증상들도 많으셨다.



이쯤되면 생각한다. 이분은... 정말 나의 진료가 정말 필요한 환자다.

전신의 대사 상태를 파악해서 교정하고, 장의 건강을 회복하고, 그래서 호르몬이 잘 대사되도록 하는게 너무나도 중요한...! 그런 분이었다. 



사실 나는 이 진료 자체가 정말 힘들어서, 오는 환자를 아주 타이트하게 조절하고, 가는 환자는 절대 안 막는 진료를 하고 있는데, 이런 분들한테는 태도가 좀 달라진다.


"검사를 꼭 해보세요. 

이렇게 힘들게 사시지 않아도 돼요. 

제대로 알고 교정하면 정말 많이 달라져요."



권한다. 

변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이런 분들에게는 말이 저절로 그렇게 나온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고양된 목소리로 진료를 보고 있던 도중 그분이 이렇게 말하셨다.



살도 빼고, 피로도 해결하고, 
자궁내막증도 병원 잘 다녀야하는거 아는데...

그냥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가,

이해할수록 먹먹했고,

그래서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사실 나를 찾아오는 이들은 자신의 '건강'에 대한 니즈가 굉장히 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

"뭘 어떻게 먹으면 되나요?


내 진료가 굉장히 자세한 편인데도, 수첩 가득 질문을 적어오시는 분도 있다.


생각해보면, 그런 분들은 나에게는 굉장히 감사한 환자였다.

이쪽으로 가세요, 방향만 제시해드리면 그분은 그쪽으로 열심히 가실테니까.




하지만 이분은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하셨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나의 말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했다.



아... 20대 중반에 암을 겪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 후로도 끊이지 않는 건강문제로 살도 빠지지 않고 몸은 피곤해 죽을 지경이면, 어떤 마음일까.



나의 '건강'이라는게
엉킨 실타래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풀긴 해야하는데, 풀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

그래서 방 한켠, 어둠 속으로 밀어두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런 존재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 후로는 그분의 말을 들어드렸다.

어떤 마음으로 살고 계신지.



그랬더니 나갈때 그러셨다.


저도 잘 돌보지 않던 제 몸인데, 
선생님이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봐주시고 하니까...
눈물이 나려해요.




그 말에 한번 더 마음이 아팠다.



이분에게 없는 건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 도닥거림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많이 힘들었구나. 괜찮아. 괜찮아질거야.




마음은 도닥여줘야 힘을 낸다.


내가 진료 뒷부분에 한 이야기는 아마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엉킨 실타래. 보고 싶지 않은 마음 이해해요.
풀고 싶은 마음이 드시면, 같이 풀어드릴게요.




그렇게 그 분은 진료실을 나가셨고, 검사도 다 하고 가셨었다.



아주 훈훈한 마무리인줄 알았지만, 역시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리가.




그 비싼 검사들 다 하고 가신 이분...!

결과를 들으러 안오시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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