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증에 대하여
내가 자주 가는 동네 슈퍼마켓에는 매일 슈퍼 앞에 진열된 과일들을 돌보는 아저씨가 한 명 있다. 그 슈퍼 아저씨는 영어는 잘 못하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내게 반갑게 인사해 준다. 백반증으로 인해 그의 얼굴과 목, 손과 팔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하얀 반점들이 있다. 일 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다부진 체구에 짙은 눈썹, 그리고 화난 듯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나는 그를 보면 조용히 옆으로 지나가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장을 보는 사람들도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마치 없는 사람인 듯 스쳐 지나갔다. 그 또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아무 감정 없이 스쳐 보냈다. 그는 분명 그곳에 있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땡볕아래서 일하는 그의 피부의 하얀 반점들에 가끔 시선이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과를 고르다가 내가 평상시 사던 사과들이 두 가지 크기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둘 다 부사사과였는데 하나는 알이 크고 가격도 더 비쌌다. 알이 큰 게 더 맛있는지 덜 맛있는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마침 옆에서 사과를 진열하고 있던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제가 고른 이 사과가 더 맛있나요?”
그러자 아저씨는 내 얼굴을 한번 보고 내 손의 사과를 한번 보더니 바지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을 꺼내 사과를 한 조각 잘라 내게 건네주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친절한 행동에 나는 사과 조각을 받아 들고 그 자리에서 한입 베어 먹었다. 입안에 아삭한 사과의 시원하고 단맛이 퍼졌다. 내가 좋아하는 꿀 사과의 맛이었다. 나는 그에게 기쁘게 웃으며 이 사과가 내가 찾던 사과가 맞았노라, 참 고맙다 인사했다. 그 순간 항상 돌처럼 굳어있을 것만 같았던 그의 얼굴 근육들이 풀리며 마치 한겨울 얼었던 강물이 녹아 흐르며 온 대지에 신비로운 봄의 기운을 불어넣듯이 그의 얼굴에 반짝이는 생명의 빛을 선사했다. 그의 얼굴과 목, 양손과 양팔의 하얀 반점들은 드넓은 파아란 하늘 위에 떠있는 하얀 구름들처럼, 싱그러운 초록 잔디밭 위에 피어난 하얀 꽃들처럼, 또 따뜻한 카푸치노 위에 올려진 하얀 우유처럼 그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보였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들 제각각의 특별하면서도 서로와 별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미국 뉴욕에 살면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은 하루에도 아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종과 언어부터 시작해서 피부색, 문화, 요리, 음악, 가치관, 종교, 성별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분들에서 사람들은 다를 수 있다. 나와 똑같은 인종, 언어, 피부색, 문화, 가치관, 종교, 성별, 그리고 나아가 요리나 음악 취향을 지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생김새도 마찬가지다. 나와 비슷한 얼굴 (눈, 코, 입), 키, 몸무게, 피부를 가진 사람들보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같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같은 공원에서 걷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길 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 내가 이 맛있는 딸기들을 먹으며 함께 나눠먹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듯 모두가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품고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은 우리가 서로 다른만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가 서로의 다름보다 서로의 비슷함에 집중하고 서로의 다름을 평가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며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보듬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슈퍼 앞에 나와 진열된 과일들을 정성스레 관리하는 아저씨를 보며 나는 매번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부지런함과 성실함덕분에 내가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음에 깊은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도 슈퍼아저씨는 열심히 일하다가 멈춰 서서 반갑게 웃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넨 뒤 오늘은 딸기가 맛있다며 엄지를 한껏 치켜세웠다. 나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믿고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예쁜 딸기들을 한가득 사 왔다. 역시 그의 말대로 딸기들은 아주 상큼하고 달콤했다. 행복의 맛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맛있는 딸기들은 잘 먹고 내 안을 행복한 에너지로 가득 채워서 나도 내일은
누군가에게 행복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누군가에게 행복은 그저 따뜻한 시선과 미소일지도 모른다. 백반증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이 큰 도움이 된다. 백반증은 피부에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백색 반점이 생기는 질환으로 전 세계 인구의 약 1% 가 갖고 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전적 요인과 자가면역등이 원인들로 추측된다. 현재 완전한 치료법은 아직 없으며 치료법으로는 스테로이드 연고나 국소면역억제제, 또는 광선치료나 레이저 등이 있으나 백반증은 잘 재발하고 완치가 어려워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다. (출처: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