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 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학파는 물론, 현대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 준 사람들도 있었다.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추천글 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니 암막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새벽 햇살이 아직 어두운 방안의 하얀 벽에 선명한 황금빛 줄무늬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눈부신 빛줄기들은 아직 새벽의 도착을 모르고 잠들어있는 어둠을 깨우는 것이 마치 자신의 의무인 듯 끈질기게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광선처럼 곧고 강력한 빛줄기들을 보며 빅터 프랭클린의 책이 떠올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골든 올포트라는 심리학자가 쓴 책의 추천글에서 처음 마주한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왜 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내 삶 속에 찾아오는 전혀 달갑지 않은 크고 작은 시련들을 미워하고 싫어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시련들이 하필 내게 찾아왔는지 끊임없이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며 누군가 혹은 무언가 비난할 대상을 찾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나는 내 안의 생각과 감정들을 잘 다스리고 있으며 자꾸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부정적인 것들을 잘 삼켰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 안의 미움과 괴로움은 특히 무의식 중에 입밖으로도 쏟아져 나와 자주 불화를 일으키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었다.
돌이켜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든 그 무엇은 내가 아무리 통제하고 숨기려고 해도 결국은 나의 일부분이 되어 내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지금도 같다. 내 안에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있으면 그 미움은 또 다른 상대를 찾아 화살이 되어 날아간다. 반대로 내 안에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은 또 다른 상대를 찾아 햇살이 되어 날아간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원리이다.
나는 이 원리가 왜 내게 유난히 어렵게 느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돌이켜보니 지금껏 나는 목적, 즉 큰 그림보다는 해결책, 즉 작은 그림들에 몰두해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일단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내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살아오니 문제 해결 능력은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내가 항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어떠한 지나친 책임감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내게 생기는 문제는 그래도 그 책임감이 좀 덜했지만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그 문제를 꼭 해결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에 힘들었었다.
스트레스는 몸을 경직시켰고 사고가 유연하게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으며 인내심도 메마르게 만들었다. 내 안에 불안은 역시나 또 다른 상대방을 찾아 날카로운 화살들이 돼서 날아갔다. 나는 반복되는 이런 상황들을 애써 정당화시키며 문제는 내가 아닌 애초에 내게 문제를 가져온 상대방의 잘못이라 결론지었었다. 아니, 어쩌면 화를 내면 내가 만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도 죄책감을 덜 느끼게 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던 같기도 하다.
다행히 지금은 이 사고방식이 굉장히 오만하고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잊고 문제에 접근하면 결국 본질에서 멀어진다. 예를 들면 내가 누군가의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면 내가 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혹시 내가 또 지나치게 선을 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오버하는 게 아닌가?) 나는 상대방이 내게 얘기할 때에는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을 열고 들어주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저 자신의 속마음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만으로도 많은 경우 스트레스와 불안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찾지 않게 되니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배우는 즐거움이 가장 크다. 전에는 몰랐거나 인지하지 못했던 작고 큰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마음이 변하면 내가 변하고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한다. 이것은 론다번의 책 ‘시크릿’과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와도 다르지 않다. 또한 빅터 프랭클린과 니체의 생각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삶 속의 무수히 다양하고 많은 시련들을 막을 수 없지만 그 시련들을 가치 있는 것들로 만들 결정은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나는 반지의 제왕에서 마법사 간달프가 세상의 종말을 막아야 하는 아주 큰 시련을 짊어진 프로도에게 해주는 대사가 떠올랐다.
"누구나 살다 보면 원하지 않은 일들을 겪게 된단다. 하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그저 우리는 주어진 매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할 뿐이지."
나와 내 동생은 둘 다 이 대사를 매우 좋아해서 평소 힘들일이 있을 때 이 대사를 서로에게 읊어준다. 그러면 그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보다도 힘이 솟아나고 항상 모든 일을 잘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딸들에게 매일같이 해주시던 말씀이 실현되는 것 같은 기적을 경험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엄마의 주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모든 것은 다 잘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