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by 이제은

나와 상대방 사이에는 길이 하나 놓여있습니다. 나는 한쪽 끝에 상대방은 반대편 끝에 서있지요. 우리는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아주 처음 이 길이 생겨났던 그 순간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처음 알아보았을 때, 다소 낯설면서도 익숙한 상대방의 두 눈동자를 처음으로 깊게 들여다보았을 때, 그래서 그 안에 피어나고 노래하고 춤추는 수줍은 아이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마치 언젠가 아주 늦은 밤 주위를 서성이며 걷다가 얼떨결에 올려다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 무수히 작은 별들이 내게 기쁨의 인사를 건네었을 때와 같습니다. 마음속 깊이 각인되는 아주 멋지고 아름다우며 황홀한 순간이지요.


바로 그 순간들로 이루어진 이 길 위에 나는 지금 서있습니다. 나는 언제든 먼저 발을 내딛고 상대방을 향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저 한쪽발을 들어서 전보다 조금 앞에 내려놓으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지요. 전에는 분명 참 쉬웠던 일인데 지금은 왜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일까요? 나는 도무지 내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해 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흙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길가의 키 큰 나무들과 아침에 노래하는 새들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마침내 내가 키우고 있는 작은 식물들에게까지도 물어보았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나는 고요한 새벽 맑게 울려 퍼지는 새소리를 들으며 나의 작은 식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자세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힘없이 노랗게 쳐진 새싹들이 보였습니다. 나는 분명 주기적으로 돌보았다 생각했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속상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무 많이 물을 주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많이 햇빛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이 작은 식물들을 더 잘 돌보아야 하며 돌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이런 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부족해서 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내가 힘없이 처진 노란 새싹들을 가엾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다시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말이지요. 또 어쩌면 내가 함께 안고 가야 할 책임감들이 무거울까 봐 미리 걱정하고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호기심과 용기가 충만했던 어린 시절 아무 걱정 없이 그저 내 앞에 새로운 길들이 생겨났다는 것만으로 신이 나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갔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길들이 좋은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이제는 진정한 좋은 관계는 나 혼자만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지나친 의지와 노력이 어쩌면 나의 욕심과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나는 분명히 주기적으로 내 작은 식물들을 돌보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 기준에 충분함이 상대방의 기준과 다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대화와 관심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고유한 양의 물과 햇빛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또 관계도 식물들처럼 생명을 갖고 있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래서 그 변화에 알맞게 물과 햇빛의 양을 조절해야 하겠지요. 물론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하더라도 우리의 관계도 힘없이 노랗게 쳐질 수도 있겠지요. 가끔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근원을 알아내지 못하며 알아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놓아주어야겠지요. 문제를 놓아주고 또 문제에 사로잡힌 나도 놓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자유로이 걸을 수 있을 테니까요.


내 마음에는 많은 길들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같이 별빛처럼 아름다운 순간들로 시작되었던 길들, 그 길 위를 어떻게 걸어갈지는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오늘부터 더 잘 돌보아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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