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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감정 가스 차단기

감정 가스 차단기


“내 딸 힘들게 하면 안 돼. 할머니 속상해!” 아이는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리더니 애정을 확인하려 할머니 품에 머리부터 들이밀며 안긴다. “그럼~ 우리 손녀 얼마나 착한데. 엄마 힘들게 하지 말자.” 몇 초 뜻밖의 편애였지만 ‘흥 거봐라, 내 엄마야~ 할머니는 엄마 편이거든?’ 유치해서 뱉지 못한 말 대신 아이에게 눈을 흘기는 것으로 승리감을 즐긴다. 결혼 후 일과 육아에 지친 딸들의 안식처, 숨 쉴 구멍인 친정ㅡ친정찬스라는 말도 있으니ㅡ이라지만 내겐 ‘해당사항 없음’이다. 친밀감과 애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의 희소가치 높은 자유시간을 딸이라서 당연한 듯 뺏고 싶지 않다. 명절과 생신, 시급한 불편 해결 같은 목적성 분명한 방문을 아빠는 늘 서운해하신다. 그러나 엄마와 나는 눈을 찡긋, “우리 오면 엄마 괜히 식사 신경 쓰셔야 하잖아요.” “그래 너도 주말엔 집에서 좀 쉬어야지.” 본심을 감추고 미리 맞춰 둔 대사처럼 주거니 받거니 한다. 서로가 진짜 원하는 걸 우리 둘은 알고 있다. 엄마만을 위한 지난달과 이번 달 <여성시대> 책자를 챙겨 놓았다. 착화감 좋은 슬링백힐 사이즈-235 색상-베이지를 선택하고, 그보다 두 사이즈 작고 색상은 블랙으로 커플아이템을 주문해 두었다. 잦은 방문보다 엄마를 더 기쁘게 할 가장 명확한 사랑 표현이다. 뜸한 연락에 며칠째 살짝 삐친 아빠는 안타깝게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편안한 공간인지 아닌지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신체 사인이 있다. 내 집이 아닌 곳에선 3-4시간만 지나도 배 안에 가스가 차오른다.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거까지 날 닮아서는,,,” 엄마는 안타까움에 어린 나의 볼록 배를 한참 문질러 주셨다. 여행지에선 물론 익숙한 친척 집 방문도 예외가 없다. 복부팽만 소화불량 딱 떨어지는 단어로는 이 불쾌함과 괴로움을 표현하기 부족하다. 부글부글 꾸르렁꾸르렁 낯섦 감지기가 경고를 보낸다. ‘당신의 몸은 불편합니다. 이제 그만 편한 곳으로 이동하세요!’ 결혼 후 처음 맞이한 명절, 가스가 차다 못해 아랫배가 딱딱해진다. 누렇게 된 낯빛으로 “엄마, 이제 여기도 확실히 내 집이 아닌가 봐.” 완전히 부모로부터 독립했음을 묵직한 고통과 함께 실감한다. 더는 음식도 못 먹고 아랫배만 누르고 있는 딸을 보다 서둘러 엄마는 동그랑땡, 갈비찜, 과일을 싸신다. “얼른 네 집에 가서 쉬어.” 몸이 먼저 인식하고 내보내는 신호에 맞춰 나의 안전한 거리와 공간은 조금씩 선명해지는 좌표를 새로 그리고 있다.


출근모드가 서서히 켜지는 일요일 저녁이라는 것만 빼면 소파에 기댄 가장 평온한 상태다. 퍼포먼스 합창 타이틀을 건 신규 TV프로그램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대열을 맞춘 20명 넘는 합창단원이 무대를 채운다. 머리통을 휘감는 커다란 울림의 노래, 칼군무는 아니지만 연습량을 짐작할 수 있는 동작들, 수줍지만 진심으로 또박또박 전하는 사연에 눈물까지 줄줄 흘린다. 합창을 막 마친 단원 한 명의 상기된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입술을 세게 닫아보지만 울컥하여 얼굴 근육이 떨리는 걸 본 순간, 청중인 나는 오열한다. 모든 팀이 무대를 마칠 때마다 눈물을 닦는 나를 보고 아이는 처음엔 달래주다 나중엔 의아해한다. “엄마, 멋지고 감동해서 우는 거 맞는 거지?” 본인 파트를 실수하지 않으려 잔뜩 긴장한 아이들의 표정이 귀여워서 울고, 노래와 동작에 soul을 담으려 노력했다는 일흔이 넘은 단원의 책임감에 울고, 경단녀라 불리지만 여전히 자신을 믿고 사랑한다는 외침이 와 닿아 운다.


애써 울음을 참는 상대의 표정에도 먼저 터져버리는 나라서 몸 속 낯섦 감지기는 민감도가 높다. 안개처럼 옅고 가벼운 감정들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앗, 방심했다. 의미 없는 여음구 같은 수긍의 답 몇 마디에 상대는 격앙된 말투로 끊임없이 말을 걸며 거리를 좁혀 온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리기 전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어깨를 가격 당한 기분이다. 예상 못한 공격에 방어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내리느라 돌아보지도 못한다. 부딪힌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쓰다듬으며 아랫배 통증을 느낀다. 무기력과 언짢은 기분을 달래러 얼른 안전한 내 집으로 가야지.


October 0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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