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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구치조림

새글 에세이시

by 새글

보구치조림


맛보다는 양이 먼저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선 추억일지 모르지만 그때에는 생존이었다. 빈곤이 보편적이었지만 특히나 먹거리의 부족은 자존감을 멀리하게 하는 낭패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철이라고 저렴하고 풍부해진 보구치가 가을밥상을 푸짐하게 해 주는 날엔 포만감에 든든해졌다. 값나가는 굴비에게 괄시를 받던 생선이었지만 한 끼의 행복을 주는 보구치의 맛을 때가 되면 혀가 기억해 낸다. 쌀보다 보리가 더 주인인 밥그릇도 고마웠던 상머리에 앉아서 감칠맛 나게 사는 맛을 알게 해 준 보구치조림이 고구마줄거리를 깔고 누워 보글바글 끓는다. 가을의 찐 맛이다. 이제는 일부러 산지를 찾아 먹게 되는 건강식이 되었다. 세월은 있고 없음을 무시하게끔 하고 미식가가 되도록 나를 바꿔주었다. 철 지난 참조기에는 비할바가 없는 보구치의 탱탱한 맛으로 가을의 깊이를 가늠한다. 싱싱생생한 가을바다가 찌게국물에 넘쳐난다. 숟가락 위에 올려놓은 보구치 살점만큼 내 속살도 차오를 것이다. 가을엔 살이 올라야 한다. 혹사당한 여름더위의 고생에 보상울 받아야 한다. 혹독해질 겨울추위를 두텁게 대비해야 한다. 제철을 어김없이 찾아온 보구치를 얼얼하게 조려 보신을 한다. 가을은 맛나게 살이 올라야 비로소 제철맞이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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