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생존 방법이야.
‘초코’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초코는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무안할 때나. 실망스러울 때나, 일단 광대부터 올리고 봤다. 안타깝게도 그의 외모와 목소리까지 잦은 미소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색이 옅은 머리칼과 눈동자, 동글동글한 곡선이 이루는 이목구비는 상대로 하여금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게 했고, 먼저 다가갈 수 있게끔 진입 장벽을 낮춰 주었다. 척박한 요즘 세상에서 원만한 인간관계 유지에 나름 도움이 되는 장점 아닌 장점을 두고 초코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나 만만해 보여? 솔직히 그렇게 착하지도 않은데.”
곧 있으면 초코와 10년지기 친구 타이틀을 달게 될 나로서는 그의 말이 반은 맞게도, 반은 틀리게도 생각되었다. 초코는 착하다. 아니, 착해 보인다. 때로는 냉정할 만큼 타인을 가차 없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초코의 본심이야 어떻든, 비추어지는 그의 모습으로 보건대 초코는 착한 사람 축에 속한다고 봤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는 초코의 특징과 성격을, 누군가는 ‘만만하게’ 여기면서도 그 사실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앞선 경험에서 대개 젊은 남자들이 그랬다.
초코의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제 1년 차가 된 초코는 선배들과 그럭저럭 잘 지냈다. 특히 3년 차가 된 사수는 일 처리가 서툰 초코에게 눈치를 주지도, 그를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러 난관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나름의 노하우를 일러주곤 하던, 나름 괜찮은 직장 사람이었다. 문제는, 사수의 동료인, 복귀한 다른 3년 차 선배로부터 일어났다. 그는 신입인 초코와 마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같이 초코를 찾아와 얼굴도장을 찍더니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말에 개인적인 약속을 잡자며 치근덕댔다. 소재는 다양했다. 새로 개봉한 영화 보러 가자, 근처에 괜찮은 카페 많이 생긴 것 같던데 가봤냐, 주말에 혹시 약속 있냐…. 초코와 내가 머리를 맞대고 짐작하건대, 그는 사내연애의 망상을 가진 것이 틀림이 없고, 생글생글 웃는 초코의 낯을 보자마자 그 상대로 낙점했을 것이다. 나는 초코의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그냥 말해. 싫다, 불편하다, 또 이러시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겠다.”
사실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마저 최대한의 친절을 베푼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초코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 그래. 계속 봐야 하는 사인데. 그냥 피해 다닐까? 아,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줄까?”
… 그 병신같은 남자가 상대를 제대로 찾은 것이다.
아, 이 무슨 쌍방 지랄 똥꼬쇼인가. 나는 둘 모두 이해되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그럴듯한, 즉, 초코가 이행할 수 있으면서 나름 확고한 뜻을 전하면서 뒤탈이 없을 만한 우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초코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조언을 구했고, 우연히 이 이야기를 들은 모임의 한 사람이 우스갯소리로 ‘즐기는 거 아니고?’라며 비꼬는 말을 하자 결국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초코는 거절 같지도 않은 거절을 하느라 점차 지쳐갔다. 결국, 병신같은 한 남자의 숨 막히는 구애는 그가 번갯불 콩 구워 먹듯 만난 한 여자와 연인 관계가 되면서 막을 내렸다. 초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등학생 때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나 역시 모임의 그 사람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남자의 관심이 싫지 않은데 만나긴 애매해서 간 보는 건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간 봐왔던 초코에 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각해본 결과, 초코가 그 남자를 진심으로 싫어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는 거절하는 일에 치명적일 만큼 소질이 없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다.
“초코 씨, 주말에 뭐 해요? 맛집 생겼던데 약속 없으면 같이 점심이나 먹을래요?”
“아, 안 그래도 요즘 주변에 맛있는 데 많이 생겼더라구요. 저도 되게 궁금했는데, 지금은 좀 바빠서…. 한가해지면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가도 좋을 것 같아요.”
애매하다. 정말 애매하다. 물론, 사회적 소통 능력이 충분히 발달된 자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아, 날 안 만나고 싶어 하는군!’ 하며 물러나겠지만, 이미 이 자는 끝없이 약속을 잡자며 들어대던, 상대의 기분과 감정, 상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다. 저 말에서 ‘네가 싫다. 단둘이 있는 게 정말 싫다.’가 아닌 , ‘바빠서 시간이 없다. 이번 주는 좀 그렇고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같이 가자.’ 따위 메시지를 읽어냈을 것이다. (발신 오류인가, 수신 오류인가.) 소통 능력이 덜 발달한 상대에게는 확실한 언어로, 명확하게 의사를 알아차리도록 거절을 해야 오히려 뒤탈이 없다. 하지만, 초코는 어쩐지 그런 순간이 오면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어 살을 붙이며 의도를 속에 숨겨 포장해 에둘러 표현을 했고, 덤으로 미안한 표정과 부드러운 미소까지 얹어주었다. 직장에서 직장 동료에게 사적인 만남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이 남자가 가장 최악이지만, 그에게 자꾸만 애매한 태도로 거절인가 싶은 거절로만 대응하던 초코가 답답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초코와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다. 나는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직선으로 뻗은 높은 코와 L자 턱을 가졌고 미소를 짓지 않으면 무표정을 넘어 싸늘한 인상이었다. 목소리도 낮고 덤덤해서, 그러한 나의 모습이 알게 모르게 남들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 나는 언제나 일부러라도 희미한 미소를 남기려 애를 썼다. (하지만 학습으로 얻은 것은 결코 습득이 될 수 없다지.) 이러한 나의 결벽적인 인상은 친분 없는 이성이 함부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한 바리케이드 역할을 했고, 다행히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거절’인 성정까지 완벽하게 들어맞아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데이트 신청을 아주 시원하고 확실하게 사양하곤 했다. 뒤에서 들리던 그들만의 담화도 1+1으로 딸려왔지만, 그런 게 무슨 대수랴. 다양한 ‘찌질맨’들 덕분에 나는 남자들과 더는 불필요한 사적 관계를 만들지 않게 되었고, 여자 친구들, 여자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생활을 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초코와 내가 ‘거절’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성향과 마음가짐에서부터 출발한다. 여러 심리 상담과 성찰, TCI 검사를 거친 결과 나는 내가 타고 나기를 공감 능력이 조금 낮은 편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사실이 슬프거나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다만, 지난날 나의 태도와 감정,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 영문도 모르고 은근한 배제를 당한 일(그 사실을 알아채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으며, 심지어 관계가 회복되고 난 후에야 그것이 내 ‘싸가지 없는 태도’ 때문에 일어난 따돌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학생 때 친구들이 내가 저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타박한 일, 고3 담임 선생님이 가끔 당황하시며 묘한 눈길로 쳐다봤던 일 등.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는데도 필연적으로 피로를 느끼고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이유 역시 공감 능력이 부족하기에 필사적으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적인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교육과 사회화,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연대감이 잘 발달되었기에 지금은 인간관계 유지에 큰 어려움이 없다.
기본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한계가 있어왔고, 이것은 긍정적인 교감뿐만 아니라 불편한 감정을 인지하는 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를테면 ‘거절’과 같은. 나는 거절을 잘 하도록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거절을 잘 할 수밖에 없는 내장 시스템을 타고 난 것이다.
반면, 초코는 상대와 감정적 교감, 교류가 충분히 잘 되는 성정이었다. 그 역시 타고난 특성이다. 상대가 편안하면 자신의 감정 역시 거기에 동화될 만큼, 따라서 본인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상대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어쩐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본인이 거절을 해야 할 상황에서도 ‘상대는 진심일 텐데’ 따위 생각이 먼저 들고야 마는, 사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사고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애석하게도 이 나라는 사회 전반적으로 ‘거절 잘 하는 여자’를 마주하길 꺼려하였으므로, 초코는 교육으로도 거절 잘 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비단 초코뿐만일까.)
초코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느낀다. (좋은 사람이니 나와 친구를…?) 그는 모든 사람의 관심과 애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했고, 실제로도 다양한 사람들이 초코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좋은 사람이기에, 더욱 그가 건강한 관계를 맺길 바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만큼, 본인의 마음까지 돌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거절을 잘, 그리고 확실히 하는 것은 분명 마음 돌보기에 도움이 된다. 불필요한 죄책감 날리기에 필수적이다. 나는 이 세상에 수많은 초코들이 부디 열심히, 신나게, 거부권을, 아니, 거절을 행사하길 바란다. 물론 나의 소중한 ‘초코’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