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디자인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친구와 호기롭게 창업에 나섰다. 이따금 계획적인 망상을 즐기는 INFJ라서 졸부가 된 모습을 상상하며 훗날 쓰게 될 책 제목도 생각해 뒀다. [몰라서 그랬어요], 평소 내 마음가짐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침대에 누워 왼손으로 코를 후비며 사진까지 찍겠다고 다짐했다. 웃기는 일이다. 창업은 해내지 못했고 나는 지금 회사원이다. (최근에 퇴사해서 정확하게는 구직자다) 우울하게 실패에서 발굴한 처연함을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랬다면 이 글은 공공재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터다.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글을 발설한다. 이유는 오히려 지금, 이 제목에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냥 내 맘이다.
같은 해 여름, 아무것도 모르면서 돌연 에디터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업은 항상 아는 게 없어서 썩 믿을 만한 무기가 주관과 깨달음뿐이다. 덕분에 매일 내 업과 관점을 정의한다며 골머리를 앓는다. 같은 해에 졸업한 동기가 디자인 툴을 하나 더 익힐 시간에 나라는 사람의 시각과 이에 수반될 지식을 한 번 더 공부한다. 그 태도가 내 자존감의 뿌리다. 유명한 편집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빼면 퍽 의미 있는 인류로 커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듯 돈은 많이 못 번다. 이건 내가 무명인 탓도 있겠지만, 들인 노력과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자책인지라 빠르게 각설한다. 에디터는 모든 것을 모르기에 매번 무너지고 그 안에서 기필코 의미를 찾아낸다. 고작 2년을 채운 별 볼 일 없는 놈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닿는 데 성공했다. 그 태도를 근간으로 지금껏 많은 의미를 발견했다.
혼자서는 아니다. 항상 뭣 모르는 내 뺨을 휘갈겨 준 거인이 있었다. 무지를 핑계로 멋대로 행동하는 놈을 침착하게 진정시켜 준 그들에게 만 백 번이고 감사하다. 지금 내 모습은 눈, 코, 입, 스타일 등 외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인이 만들었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멋쩍은 웃음을 연발하며 마음을 전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도 많고 만나지 못할 인물도 있어서 다른 방법을 택했다. 지독하지만 이것도 쓸 만한 정보가 담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글로 옮긴다. 심심한 감사를 전함과 동시에 보물상자에 그득 적재해 두었던 발견을 공유하는 기록 정도다. 지루한 요즘 말로는 인사이트겠다. 대다수에게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어떤 소수에게는 요긴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동력이다. 이곳은 돈 받고 글을 쓰는 곳이 아니니 하고 싶은 이야기나 마음껏 하련다. 거룩한 성공을 이루고 사용하려던 제목을 부딪침에서 비롯된 발견과 거인으로부터의 배움으로 메워본다.
기록을 채워 나가기에 앞서 지금의 번뇌를 남긴다. 갖은 발견을 정성껏 나열하다 보면 꽤 먼 페이지에서는 이 고민에도 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면 말고.
번뇌의 주체는 사회에서의 역할이다. 과거, 매거진 에디터는 귀한 전달자였다. 내가 가장 빼닮고 싶어 하는 박찬용 에디터(자세한 사유는 나중에 다룰 예정이다)는 지난 에디터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라이프스타일 에디터들의 경험이 정말 귀했다. 외국에 가기도 쉽지 않던 때였다면 4대 컬렉션을 실제로 보고 온 사람들이 취향왕이 될 수밖에 없다. 외국 여행 정보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 앤트워프 정도만 다녀오고도 아주 가기 힘든 곳에 갔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은 그렇게는 안 된다.” 이 이야기를 쓴 시점이 2017년이고 지금은 무려 2023년이다. 기술은 더욱 발전했고 정보 습득은 들숨에 들였다가 날숨에 토해낼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하다. 굳이 에디터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를 통해 쉬이 전달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연남동의 카페 다섯 곳을 소개하는 것은 콘텐츠 마케터가 기업에 이익을 남기기 위한 데이터를 분석하면서도 쉬이 해낸다. 심지어 해당 분야 유명인의 추천이라면 더욱 효율이 높으니, 경험과 발견에 의존해 글만 조지는 에디터는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정도로 얕은 글만 쓰지는 않는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발견자의 역할을 내가 하는 것이 효율이 없다면 맡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입 닫고 하면 되는데 참 지독하다.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공공재로서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고민이 깊어진다.
응당한 역할을 모른 채 정제된 정보나 하고 싶은 이야기만 배설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회나 회사에 왜 필요한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갖은 절망의 순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번뇌는 언제나 부족함에서 기인한다. 썩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애써 나를 찾아오지 않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찾아볼 필요가 없는 이야기이거나 찾아올 필요가 없는 사람이거나. 긴 시간 두고 봐야 하겠지만, 멍하니 서 있기만 하다면 그 교집합 부분이 따스한 내 보금자리가 될 수도 있겠다. 불안에서 비롯한 망상이 두려워서라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고자 한다. “사회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에디터인 내 역할은 무엇이고 어떤 것을 내놓아야 하는가?” 스스로 묻는다. 이 물음에 답하듯이 일하다 보면 또 어떤 거인이 내 뺨을 후려갈기며 발견을 잉태할 수 있는 힌트를 내어 줄지 모르는 일이다. 간곡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왼뺨을 깨끗이 닦고서 몰라서 그래왔던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