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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Nov 16. 2017

좋은 취향이란 게 뭘까

글쎄요

"취향도 좋으시겠어요." "음악도 많이 알고 영화도 많이 아시겠네요." "요즘 어디가 잘 나가요?" 어디 가서 잡지 에디터라고 하면 이런 말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면 조금 난처하다. 나는 한달에 극장을 한 번도 안 간다. 음악도 굉장히 열심히 찾아듣는다고는 할 수 없다. 용산구나 마포구나 성동구에 있다는 힙한 곳도 잘 모른다. 이 업계에는 새로 나온 곳을 열심히 알아내서 틈날 때마다 찾아가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런 과가 아니다. 내가 인지도가 낮은 무명 에디터인 이유는 이렇게 세상의 흐름에 무신경해서일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업계는 취향이라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무슨 음악을 듣는지, 무슨 영화와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았으며 지금은 무엇을 몇 시즌까지 봤는지, 어느 브랜드의 무슨 옷을 어디서 샀는지, 이번 휴가에는 어디에 가서 어떻게 지냈는지, 거기는 한국 사람이 얼마나 없었는지. 가만히 보면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물론, 삶의 곳곳에 배어나는 취향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취향까지 있는 것 같다. 취향을 숭상하는 동시에 취향을 숭상하는 취향을 좋아한달까.


취향에 의미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삶의 모든 일을 취향이라는 단위로 들여다볼 수도 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당신이고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일 수 있듯 당신이 쓰는 물건 역시 당신일 수 있다. 몰스킨 다이어리를 쓰느냐, 반스를 구겨 신느냐, 검은색 로퍼에 흰 양말을 신느냐 검은색 양말을 신느냐 아니면 회색 양말을 신느냐, 이런 요소에 따라 취향이라는 게 미묘하게 드러날 수 있다. 국기가 나라의 상징이고 가볍게 덮인 금발 가르마가 도널드 트럼프의 상징이듯 우리가 걸치고 쓰는 물건이 우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사는 것만 해도 피곤해 죽겠는데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어딨어. 하지만 이쪽 사람들은 그렇게 작은 요소가 모여 취향이라는 게 드러난다고 믿는다.


적어도 에디터를 하면서 취향이 안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의 일 중엔 여러 가지 중 뭔가를 골라서 소개하는 일도 포함된다. 뭔가를 골라 소개하려면 선별과 배제의 기준이 필요하다. 취향 역시 기준이 될 수 있다. 아디다스 스탠 스미스와 푸마 스웨이드와 나이키 코르테즈는 발을 보호하고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신발의 기능적 측면에서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나이키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아디다스에서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 푸마 앞에서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 걸 취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면 당연하다. 취향은 양현석의 아이돌 선발 기준처럼 모호하기 때문이다. 아니, 모호해도 된다는 말이 더 맞겠다. '취향이니까'라는 말을 포스트잇처럼 아무데나 붙이고 다니는 세상이니까.


얼마나 신경을 쓰느냐에 따라 취향은 끝없이 예민해질 수도 있다. 예민한 취향은 가격의 문제도 아니다. 올리브영에서 파는 립밤의 색깔을 고를 때도 취향에 따라 물건을 고를 수 있다. 화장실에서 쓰는 두루마리 휴지를 쓸 때도 엠보싱 무늬에 따라 어떤 물건을 배제할 수 있다. 비싼 건 말할 것도 없다. 똑같은 플래티넘 시계 중 파텍 필립을 사느냐 랑에 운트 죄네를 사느냐 아니면 가장 흔한 롤렉스를 사느냐. 꼭 돈 주고 사는 물건에만 취미가 적용될 리 없다. 똑같은 베토벤 3번 피아노 소나타라도 루빈슈타인을 듣느냐 키신을 듣느냐, 오랜만에 옛날 노래를 듣고 싶은데 X-재팬을 듣느냐 루나 씨를 듣느냐, 쥬라식 5를 듣느냐 라킴을 듣느냐, 이런 것도 다 취향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까지 읽으시다 보면 이게 다 뭔가 싶으실지도 모른다. 바로 그거다. 취향은 기본적으로 속물적인 지표다. 지금까지 예로 든 취향이 쌓이려면 가처분소득이라는 자원이 필요하다. 돈이 다가 아니다. 취향을 쌓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원은 시간이다. 돈+시간+공부라는 개인의 자원을 열심히 지속적으로 집어넣어야 취향이라는 지적 아카이브를 쌓을 수 있다. 살다 보면 어디서든 자기가 쌓은 취향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취향이든 뭐든 소중히 만든 걸 자랑스러워하는 태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분야에서든 대놓고 너무 심하게 자랑하는 건 천박한 일이다. 취향도 예외는 아니다.


취향이라는 허들은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초고속인터넷과 항공사 특가요금 덕분이다. 이쪽 업계에서 막연히 좋은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보면 서유럽이나 북미(혹은 가끔 일본)의 특정 계층에서 잘 나간다고 칭하는 것들인 경우가 많다. 좋은 취향을 보고 접하려면 선진국으로 취향 구경을 가면 된다. 지금은 인터넷 덕분에 좁은 방 안에서도 버질 아블로나 뎀나 즈바살리아처럼 이쪽 세계의 경향을 이끄는 사람들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라이프스타일 에디터들의 경험이 정말 귀했다. 외국에 가기도 쉽지 않던 때였다면 4대 컬렉션을 실제로 보고 온 사람들이 취향왕이 될 수밖에 없다. 외국 여행 정보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 앤트워프 정도만 다녀오고도 아주 가기 힘든 곳에 갔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은 그렇게는 안 된다. 항공료는 날이 갈수록 싸지고 있다. 초고속인터넷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차 안에서 초고속인터넷을 즐기는 일은 10년 전만 해도 첨단 기술이었다. 기술적 발전에 맞춰 블로거라는 신종 정보 생산자와 인플루언서라는 신종 유명인이 생겨났다. 에디터의 취향을 잉태하는 에디터만의 체험이라는 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


속물세계의 취향을 자랑하는 일이 좀 지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 지 모르겠지만 이제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건 꽤 많이 상향 평준화됐다. 잡지 에디터를 포함한 모든 저널리즘 종사자는 이제 네티즌이라는 익명의 전문가에게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익명의 네티즌 중에서는 화가 많이 나서 어디서든 근거 없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사이에 분명히 아주 많이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 확신한다. 말 없이 터치스크린을 만지작거리며 이런 글을 보는 당신같은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취향을 드러내는 건 좀 낯부끄러운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 취향이 속물적인 징표라면 취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좋은 취향이 아니다.


그러니 혹시 어딘가에서 에디터들이 하는 취향 어쩌구 하는 말에 별로 주눅들 필요가 없다. 서유럽/북미의 마이크로트렌드를 조금 구경한 후 취향이라고 떠들 수 있는 시대는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와 함께 끝나고 말았다. 어떤 선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스타그램에 어떤 인플루언서가 자기 사진을 올리는데, 샤넬 가방을 색색깔로 다 갖고 있는 거야. 내가 패션 에디터면 저런 애를 어떻게 이기나 싶더라구. 경험의 양에서 너무 차이가 나잖아.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해서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까?" 경험의 양과 통찰의 질이 비례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선배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그 선배는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고만고만한 취향이 아니라 태도가 더 중요한 시대다. 존경하는 <아이즈> 강명석 편집장도 한 칼럼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최근 미디어는 한국의 중년 남자에게 문화적 취향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지금 가장 주목받는 예능인은 취향을 포기한 김생민 씨라고. 김생민은 취향을 포기한 대신 다른 취향을 조심스럽게 인정하는 태도를 갖췄다고. 취향 이전에 바뀌어야 할 삶의 태도가 있다고. 맞는 말이다. 더 좋은 취향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게 뭐든 그 사람의 취향을 그 취향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에디터적인 취향이라는 말은 우습지만 에디터적인 태도라는 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세상 모든 일의 재미를 궁금해하는 호기심. 자기가 모르는 세상 앞에서의 겸손함. 남에게 정보를 주어야 하니 어디서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겸허한 자세.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마음. 적다 보니 이런 사람들이라면 에디터 말고 다른 일을 더 잘 할 것 같기도 하다.


물건이 어느 때보다 많아지지만 물건의 변별력은 점점 떨어지는 세상이다. 이럴 때야말로 정말 개성적인 취향의 에디터가 필요할 수도 있다. 대신 그 좋은 취향 안에는 겸허한 태도라는 요소도 들어 있을 것 같다. 공작의 깃털처럼 취향을 전시하던 시대는 동방신기가 5명이던 시대처럼 지나갔다. 겸허한 삶의 태도가 세련된 거라는 세계관이야말로 좋은 취향 아닐까 싶은데.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인지도 없는 무명 에디터로 남아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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