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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Sep 07. 2017

잡지의 외국어

꼭 그래야 할까

외래어는 멀리서 DHL로 보내온 식재료처럼 늘 책상 위에 쌓여 있다. 원고를 만들고 마감을 할 때면 나는 온갖 외래어 사이에서 고민한다. 외래어라는 외산 개념을 어떻게 한글이라는 알파벳으로 표현해야 할까. 스플릿 세컨드를 그냥 스플릿 세컨드라고 쓸까 아니면 좀 풀어 쓸까.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 씨의 이름 뒤에는 한자를 넣어야 할까 말까. 너도나도 쓰는 스타트업같은 말은 막상 열어보면 신규 창업 수준인데 나까지 이 말을 내 페이지에 담아야 할까.


잘 아시다시피 잡지에는 온갖 외래어가 나온다. 디퓨저처럼 외국 단어가 나오기도 하고 HUD(헤드 업 디스플레이)나 DLC(다이아몬드 라이크 카본)처럼 약어가 나오기도 하며 투르비용이나 폴터가이스트처럼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말이 나오기도 한다. 영어나 일본어를 과격하게 직역해서 읽다 보면 칼로리바란스를 급하게 삼키는 것처럼 잘 삼켜지지 않는 문장도 적지 않다. 왜일까? 잡지에 나오는 글은 꼭 다 그래야 하는 걸까? 글쎄,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라이프스타일 잡지에서의 외래어는 지난 주에 말한 비싼 물건보다 더 불가피한 면이 있다. 새로운 물건과 새로운 문화가 소개되면 그를 소개할 새로운 말도 필요하다. 잡지에 외래어가 많이 나온다고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외래어를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 욜로, 밀레니얼, 스타트업, 하이 웨이스트 진, 보이프렌드 진, 펠라티…아 에헴 음 음 아무튼. 게다가 라이프스타일 잡지는 (엄밀히 실시간은 아니어도)개념적으로는 늘 가장 새로운 것을 다룬다. 바깥 나라의 새로운 것을 소개하는 데에 새로운 말이 따라오는 건 당연하다.


나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김태영 선배는 한국의 자동차 기자 중에서 가장 운전을 잘 하는 기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자동차 전문 입장에서 외래어 사용의 어려움을 말해주었다. 그는 외래어 사용의 어려움을 떠올리는 첫 사례로 차량이라는 말을 꺼냈다. 차량이 외래어라고? 그렇다. 차량은 일본식 한자어다. 한국어에서는 차량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의 말로는 디퓨저나 사운드 시스템같은 말이 정말 한국어화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굳이 한국어로 풀자니 너무 길어지고(문장의 가독성과 리듬 때문에라도 문장과 구절의 길이는 중요하다), 또 꼭 필요해서 한국어로 풀다 보면 북한말처럼 고압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되고.


내가 맡은 시계 분야도 비슷하다. 대표적인 게 크라운이다. 시계 오른쪽이나 왼쪽에 달려서 시간을 돌리거나 태엽을 감을 수 있는 손잡이를 크라운crown이라고 한다. 크라운의 원래 뜻은 왕관이다. 영영사전에 나오는 뜻도 '힘의 상징이자 왕조의 보증'이다. 시계 태엽을 감는 손잡이를 크라운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일종의 비유다. 용두龍頭 역시 '용의 머리'라는 일본산 한자어다. 크라운이라는 비유적 표현에 대한 동아시아식 이중 비유인 셈이다. 일본식 한자를 쓰느니 영문 표현을 쓰는 게 낫다. 내가 일했던 한국 최초의 시계 전문지 <크로노스>의 뜻이었다. 용두는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말이지만 그 이후로 나도 늘 원고에 크라운이라고 쓴다. <크로노스>에 동의한다.


이 외에도 외국산 단어는 아주 많다. 음식이나 술, 여행에서는 더 많이 나온다. 바질페스토, 브리 치즈, 링귀니. 하이랜드 위스키, XO 등급, FCB, LCC, 에어비앤비, 다크 투어리즘. 외국산 문화의 산물이 가장 먼저 들어와서 직업 기자와 편집자에 의해 한국어 기사화되어 정기간행물로 유통되는 곳이 잡지다. 일종의 방역본부처럼 잡지는 외래어 수입의 최일선 중 하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최일선에서 가장 적합한 표현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지금까지 든 예는 사전적인 경우에 속한다. 사전적인 의미 쪽은 그나마 낫다. 몇 명이 머리를 맞대고 합의하면 적당히 만족스러운 한국어 표현형이 나올 수 있다. 어떤 건 그대로 가자, 어떤 건 좀 한국어로 바꿔보자, 이런 식으로. 패션 쪽은 조금 더, 아니 사실은 훨씬 더 모호하다. 개념이라기보다는 인상에 따라 좌우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패션 용어를 번역하거나 원고를 만들어 보면 실제로 꽤 어려워진다.


쉽게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심플한 룩 같은 건 간결한 느낌 정도로 하면 된다. 그렇다면 아이스 진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진? 그런데 블루 진은 외래어가 아닌가?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은? 싱글 몽크 스트랩 슈즈는? 페일 블루는 어떻게 쓰지? 보이프렌드 진은? 무작정 번역하다가 글이 길어지면 그것도 곤란하다. 꼬르소 꼬모에서 판매하는 타셴의 책으로 하면 캡션 칸이 넘어가서 어쩔 수 없이 타셴 by 꼬르소 꼬모라고 하기도 한다. 외래어를 한국어로 쓰는 데에는 이런저런 소소한 사정이 있다.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한국어 잡지 에디터들도 나름 열심히 노력한다.


<배를 엮다>속 등장인물들은 정말 꼼꼼하고 오랫동안 노력한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월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월간지는 월 마감이다. 매달 20일에서 21일 정도에는 전국의 서점에 깔려 있어야 한다. 마감에 쫓기며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원고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촬영 스케쥴. 내가 잊은 남의 부탁과 남이 잊은 나의 부탁. 전날 먹은 야식 때문에 생긴 소화불량과 그로 인해 생겼다고 추정되는 왼쪽 눈썹 위의 뾰루지, 이런 것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원고를 만든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잘못되거나 나중에 봤을 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싶은 표현이 인쇄되고 만다. 징징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걸 안다. 프로페셔널이라면 어느 환경에서든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한정된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현장의 잡지 에디터들이 다 잘 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표현해도 되는 걸 어렵게 표현하면 멋있어 보일 거라는 못된 버릇이 있다. 외래어는 그럴 때 외산 식재료처럼 쉽게 쓰이는 소재다. 심플하다, 시크하다, 엘리건트하다, 오소독스한, 같은 표현들. '뎀나 즈바살리아가 이끄는 발렌시아가의 언패셔너블 시크'나 '뉴욕 스트리트 감성이 제대로 느껴지는 슈프림 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표현. 내 페이지에 저런 수식어는 넣지 않으려고 한다.


발음을 어떻게 표기하느냐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업계의 교정사 선생님들이 고집하는 발음 중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팜므 파탈도 교정을 거치면 팜 파탈이 된다. 교정을 존중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독자 입장에서 팜 파탈이라고 하면 좀 고개를 기웃거릴 것 같긴 하다. 아무튼 말과 글을 다루는 일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수다거리들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엘리게이터와 크로커다일을 둘 다 악어가죽이라고 썼다가 큰일날 뻔 한 적이 있다. 두 악어는 종이 다르다. 가죽의 무늬와 질이 달라서 둘은 가격도 다르다. 침팬지와 오랑우탄을 원숭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쩌면 외산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만드는 우리는 늘 외래어를 접하면서 모국어의 어휘 범위를 조금씩 넓히고 있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영어권에서도 김치는 KIMCHI고 스시는 SUSHI다. 꼭 잡지가 아니라도, 번역가든 무역업자든 해외와 직접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각자의 한국어로 자신이 받아들인 개념을 한국어화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해외의 자료나 개념으로 원고를 만들 때 외래어를 원어로 쓰느냐 마느냐는 둘째 문제다. 읽기 좋은 문장 모듬을 만드는 게 먼저다. 외국에서 쓰는 스타트업이라는 말을 직역하느냐 의역하느냐. 의역한다면 어떤 말로 하느냐. 의역되거나 직역된 표현이 앞뒤 문장과 얼마나 잘 붙으면서 독자의 눈에서 쉽게 미끄러지듯 넘어가느냐. 내게는 그게 더 중요하다.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제 원고를 읽으면서 이상한 외국어적 표현이 보이면 거리낌없이 지적해 주시길 바란다.


이번 달에도 원고를 만들면서 고민할 것 같다. 외래어를 옮길 때는 딱히 답이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콘텐츠'에 해당하는 한국어 표현형을 찾고 싶은데 아직 제대로 못 찾아서 답답하다. 시계의 스트랩과 브레이슬릿, 케이스를 대체할 수 있는 한국어 표현형도 몇 년째 생각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업계에 계시던 어떤 선배는 카메라를 '바디'라고 쓸지 '보디'라고 쓸지도 계속 고민된다고 했다. '수트'와 '슈트'도 어감이 다르니까. 왠지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라고 하면 잠수복이 떠오르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한 번의 마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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