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만난 젊음

흐름이 버거운 날, 멈춤의 용기를 배운다

by 안명심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인파 속, 나는 멈춰진 시간의 섬에 서 있었다.

맞은편 노약석 벽면에 기댄 스무 살 남짓한 여학생 때문이었다. 그녀는 귓가에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한 채 서 있었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된 듯한 그 모습은 문득 나의 이십 대 초반을 소환했다.

그 여학생에게서, 숨 막힐 듯이 전속력으로 내달리기만 했던 나의 과거를 발견했다.
​나의 스무 살 언저리는 '젊음'이라는 수식어와는 한참 거리가 먼 시절이었다.

우울했고, 불안했고, 세상의 기준과 내 현실 사이의 괴리에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남들이 청춘을 노래하고 미래를 설계할 때, 나는 고단한 십 대 후반의 짐을 스무 살의 어깨에 고스란히 짊어진 채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춤을 모르는 채 오직 생존이라는 본능적인 흐름에만 몸을 맡긴 채였다.

그 시기에는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 돌릴 권리조차 사치였다.

삶은 흑백이었고, 청춘의 색깔은 희미했다.

내가 가진 젊음이라는 자원은 소진될 연료에 불과했고, 그것이 주는 생기나 희망 같은 건 느껴볼 새도 없이 그저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쉼 없는 흐름 속에서도 삶은 때로 강제로 멈춤의 순간을 선사했다.

지독한 감기몸살에 시달려 며칠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실패 앞에서 모든 계획이 좌절되었을 때. 그때의 멈춤은 고통스러웠으나,

찰나의 침묵 속에서 비로소 나의 내면을 만날 수 있었다. 멈춰 서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달리고 있었는지,

내 안의 진정한 욕망과 목소리가 무엇인지.

그때 처음으로 펜 가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속도를 찾으려 노력했다. 강제된 멈춤이 오히려 방향을 수정하고 재정비할 기회가 된 것이다.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맑은 하늘처럼,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니 다시 나아갈 힘이 생겼다.


​오늘날의 청춘들은 나보다 훨씬 더 빠른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정보는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경쟁은 전 지구적이다.

그 여학생의 귀를 막고 있는 이어폰은, 어쩌면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멈춤을 만들어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자신의 작은 세계에 온전히 침잠함으로써, 가속화되는 세상의 속도를 잠시 늦추려는 몸짓.
​흐름과 멈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멈춤은 흐름을 위한 준비이고, 흐름은 멈춤을 위한 이유가 된다. 무작정 흐르는 물은 결국 웅덩이에 고여 썩기 쉽고, 영원히 멈춰 선 시계는 시간을 잃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의 균형이다.

젊음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역동적인 흐름과,

그 에너지가 소진되기 전에 스스로를 점검하고 내면을 충전하는 사색적인 멈춤의 조화.
​나이가 들고 세월의 흐름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우리는 영원히 젊은 채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젊음이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흐름이었을지라도, 그 시간들 속에 박혀 있던 찰나의 멈춤들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다.

그 멈춤 속에서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했고,

가장 절박했으며, 가장 뜨거운 생명력을 발견했다.


​그녀의 이어폰 속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지고 있을까. 혹시 그 소음 속에서 자신만의 평화로운 멈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모습을 보며 이제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쉼 없이 흘러온 시간 속에서, 또다시 나만의 고독한 멈춤이 필요함을 느낀다.

여전히 세상의 속도는 빠르지만, 이제는 안다.

잠깐 멈춤 버튼을 누르는 용기가, 결국 삶의 흐름을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춰 섰고, 여학생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삶의 모든 순간이 흐름과 멈춤의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맹목적인 젊음의 흐름 속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용기 있는 멈춤이다.


그리고 그 멈춤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 힘차게 흘러갈 수 있는, 더 나은 방향을 찾게 될 것이다.


삶은 멈추었다 흐르는 영원의 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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