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운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책을 읽었다. 결혼 전에는 자기계발서를 탐독했고, 결혼 후에는 『스님의 주례사』를 재독 삼독하며 부부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출산을 하고부터는 수많은 육아서들을 섭렵하면서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애썼다.
책을 읽는 틈틈이 유튜브 육아 강의를 찾아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법륜스님과 김미경, 조선미, 오은영, 서천석, 최성혜, 이보연, 최민준, 조세핀김, 임영주, 세바시……. 기억나지 않지만 많은 강의들을 듣고 메모하고 적용하고 반성하고 자책하고 용기내고 다시 듣길 반복했다.
나의 육아 멘토들은 "아,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구나"를 강조했다.
"부모는 아이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부정적인 감정을 먼저 읽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른바 '마음 읽기, 감정 공감하기'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아이가 레고 조립을 하다가 잘 안 돼서 화를 내며 장난감을 집어던졌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육아전문가들은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절대 흥분하지 말고 "레고 조립이 마음대로 잘 안 돼서 화가 났구나!"라는 식의 마음 읽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모가 "그랬구나"라며 공감하는 순간, 씩씩거리던 아이는 "네, 잘 안 돼서 속상했어요" "화가 났어요" "미웠어요"라고 말하며 휘몰아치는 감정을 조금씩 진정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구나!
이처럼 마법 같은 단어가 또 있을까! 화가 많이 났구나, 속상했겠다, 마음이 안 좋았겠네, 그래서 화가 난 거구나, 아, 그랬구나…….
그러나, '그랬구나'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예민보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예민보이는 스틱에 초코를 묻혀 토핑캔디를 찍어먹는 '초코픽'이라는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러다 그만, 식탁 위에 과자통을 엎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개아들 몽이가 바닥에 떨어진 토핑캔디를 핥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예민보이는 식탁 아래에 흩어진 색색의 토핑캔디와 개아들 입가에 묻은 토핑캔디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몽이에게 발길질을 하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예민보이와 초코픽. 예민보이들에게는 초코픽처럼 쏟았을 때 난감한 과자는 사주지 않는 게 좋다.
당시 나는 예민보이가 보통의 아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해서 육아 멘토들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게 '그랬구나'를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예민보이가 우유를 쏟고 울면, 나는 "우유가 쏟아져서 속상하구나"라고 말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부러져서 난리를 치면 "장난감이 부러져서 화가 났구나"라며 마음을 읽어주었다. 마트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면 "엄청 갖고 싶은 거구나. 그런데 지금은 사줄 수 없어. 약속한 날 사러 오자" 하면서 예민보이를 달랬다.
그날도 나는 올라오는 화를 누르며, 육아 멘토들의 가르침대로 '그랬구나'를 시도했다.
"과자가 쏟아져서 많이 속상하구나. 속상한데 몽이가 과자를 먹어서 더 화가 났지?"
나는 알알이 흩어진 토핑캔디를 손으로 긁어모았다. 과자회사는 왜 하필 과자통을 잘 넘어지게끔 만들어서는 세상의 많은 예민보이들을 자극하는지, 개아들은 왜 똥개처럼 아무거나 주워먹는지, 나는 왜 엄마가 돼서 찌질하게 아이 눈치나 살피는지, 그런 답답한 질문들을 던지며 입 속으로 C8C8 욕을 해댔다. 속으로 욕을 할지언정, 겉으로는 공감의 가면을 쓴 채 말이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민보이는 한 옥타브를 더 높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몽이가 먹었잖아. 그건 어떻게 해! 지금 당장 다시 사줘! 안 사주면 몽이 또 때릴 거야! 몽이 쓸데없어! 다 엄마 때문이야……!"
응? 내가 뭘 어쨌다고? 내 죄라면, 초코픽을 사준 죄, 네가 초코픽을 골라잡을 때 말리지 않은 죄밖에 없었다.
예민보이는 자기 분에 못 이겨 나를 밀치고 때렸다. 나는 예민보이가 나를 때리지 못하게끔, 양손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했다. 이것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애청자였다면, 누구나 다 아는 방법일 것이다. 나는 한참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예민보이는 이십 분이 지나도 삼십 분이 지나도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놔, 빨리 놔!"
"니가 진정하면 놔줄 거야."
"진정됐어. 빨리 놔줘!"
"아직 진정 안 됐어."
그런 실랑이가 한참 동안 더 이어졌다. 그러나 예민보이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잠깐 가라앉았나 싶다가도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나 화장실 가야 돼! 빨리 놔줘!"
"아냐, 아직 진정 안 됐어."
"그냥 바닥에 싸버린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예민보이는 진짜로 바닥에 오줌을 쌌다. 바지가 금세축축해졌다. 그걸 본 예민보이는 더 큰 소리로 발악을 했다.
"왜 안 보내줘!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잡아서 오줌 싼 거야! 엄마 나빠, 엄마 미워, 엄마 쓸데없어, 엄마 죽었
으면 좋겠어……!"
예민보이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상기됐다. 그 모습은 산도에 끼여 좀체 내려오지 않던 예민보이의 출산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줌을 쌀지언정 꺾이지 않겠다. 절대 호락호락 굴복하지 않겠다!
예민보이 저항충만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예민보이가 오줌을 쌈으로써, 자신의 고집을 저항과 투쟁으로 승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내 양손을 놓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일반화에는 예외라는 것이 존재한다. 육아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예민보이는 몇 안 되는 예외에 속하는 아이였다. "그랬구나"라고 말하는 순간,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예민보이는 더 심하게 흥분했다. '그랬구나'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아이, 그게 바로 내 아들 예민보이였다. 나는 그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데 딱 10년이 걸렸다. 물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해도,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육아서를 많이 읽지 않는다. 육아강의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읽고 보고 공부했던 10년의 시간들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알고 안 하는 것과 모르고 못 하는 것은, 차이가 있으므로.
책 속에 '내 길'은 없었다.
어떤 책에서도 어떤 강의에서도, 예민보이에게 초코픽을 사주면 안 된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내 길은, 하루하루를살아가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와 싸우면서, 넘어지고 울면서, 반성하면서, 술 마시면서, 욕 하면서, 용서하고 용서구하면서, 그렇게 만들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나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