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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연필 Feb 10. 2022

예민보이선발대회는 없나요?

얼마 전, 지인의 아이가 예쁜어린이선발대회에 나가 카메라 테스트를 받고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예민보이를 재우고 나서, 남편과 나는 맥주를 나눠마시는 중이었다.


"그 집 딸이 흥이 좀 넘치긴 해. 쇼맨십이 있더라구."

"딸이라 그런가? 볼 때마다 생글생글 웃는 게, 나도 그런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더라."

"낳고 싶다고 낳아져?"

"그러게, 전생에 나라 좀 구하지 그랬어?"

"뭔 소리야! 성별 결정은 남자쪽 염색체 때문인 거 몰라?"


우리는 소리를 죽인 채 웃었다.   


"그런데 자기야, 예민보이선발대회 같은 건 안 생기나? 그런 게 있으면 우리 애가 적격인데 말이야."

"예민보이선발대회? 그거 재밌겠다."

"출전만 하면 입상은 따놓은 당상이지!"

"입상이 뭐야? 자기는 우리 애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뭐가?"

"나는 대상감이라고 확신해!"

"대상?!"






예민보이의 예민함은 가히 하늘을 찔렀다. 혹자는 "자식의 허물을 끄집어내는 게 무슨 부모냐"며 눈살을 찌푸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자학과 해학을 즐길 줄 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대화는 절망을 견디는 한 방법이라고 할까? 그러니 도덕적인 잣대는 잠시 넣어두시길 바란다.  

 

예민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예민하다.


옷의 안쪽 상표는 웬만하면 다 제거해야 하며, 신발은 신고 벗기 편한 크록스 형태의 슬리퍼를 고집한다. 양말 안쪽의 실과 보풀은 주기적으로 떼어내야 하고, 슬림한 바지류는 절대 구입하면 안 된다. 입었을 때 불편하고 심기를 건드리는 옷은 옷장 안에 방치되기 일쑤다. 대표적인 예가 뽀글이자켓이다.  


"새로 산 잠바는 왜 안 입어?"  

"자꾸 털이 빠져서 불편해."  

"빠지면 빠지는 대로 입어. 처음에만 좀 빠지다가 나중엔 안 빠져."  

"안 돼. 학교에서도 자꾸 빠져서 신경 쓰여. 빠진 털 주워서 다시 옷에 붙이느라 힘들었단 말이야."


뭐, 빠진 털을 주워 붙였다고? 이건 또 무슨 도그 소리야!

 

밥은 또 어떤가. 버섯과 미역은 미끌거려서 안 먹고, 김치 종류는 냄새가 강해 못 먹으며, 조개와 굴 등의 갑각류는 그냥 안 먹는다. 카레와 짜장 같은 덮밥류는 밥의 반만 덮는 반반비율을 엄수해야 한다. 밥 역시 흰쌀밥이 아니면 잔소리가 날아온다. 달걀프라이의 노른자는 살아있어야 하며, 중멸치는 징그럽다는 이유로 잔멸치만 식탁에 올릴 수 있다. 똑같은 반찬을 연달아 내놓으면 큰일나기 때문에, 반찬의 로테이션에 신경을 써야 한다. 식사 때마다 맨날 밥 종류를 올려서도 안 된다. 떡볶이도 주고 빵도 주고 후레이크도 줘야 한다. 자기 숟가락과 그릇은 절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없고, 식판에 밥을 담을 땐 반드시 밥은 왼쪽, 국은 오른쪽에 담는 '좌밥우국룰'을 지켜야 한다. 설령 식판을 내려놓자마자 국에 밥을 말더라도 말이다. 과자나 아이스크림이 땅에 떨어지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다. 즉시 재구입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에는 큰 고난이 닥치기 때문이다.   

 

예민보이는 신생아 때부터 잠투정이 심했다. 커서도 그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아, 지금까지 자다 깨서 나를 찾는 날이 많다. 아직 잠자리 분리가 안 돼 안방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같이 자는데, 재운 뒤 침대 위로 올라가면 얼마 뒤 어김없이 "엄마? 안아줘"라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예민보이의 피부엔 내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반응하게 돼 있는 센서 같은 것이 내장돼 있을지 모른다.

하루는 예민보이에게 이제 슬슬 혼자 자보는 연습을 해보자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성공하면 게임 두 시간!"

꼬시기 작전을 카드로 제시한 나.  

"진짜? 엄마 말 바꾸기 없기다."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답하는 예민보이.

왜 진작 이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이제 나도 십여 년 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침대에서 편히 잘 수 있겠구나!  

나는 언제부터 혼자 잘 수 있는지 물었다.  


"말 나온 김에, 오늘부터 당장 시작할래?"  

"음……."


한참 뜸을 들이던 예민보이가 "알았어"라고 말했다.  

이거 너무 쉽잖아,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예민보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음 생에! 다음 생에 혼자 잘게!"   

 

예민보이는 감각도 예민하다.


그중에서 청각은 단연 돋보인다. 일반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까지 듣고 반응해서, 감탄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말인즉슨,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예민보이의 귀에는 실제보다 더 크게 들릴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상대방 목소리는 크게, 자신의 목소리는 작게 들리는 이상한 청각을 소유했다고 할까. 그렇다 보니, 내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화내는 것으로 오해해, 나보다 더 크게 소리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피곤하다.  

나는 한때 청각의 민감함을 예술로 승화시켜볼 깜찍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민보이는 음악에 큰 흥미가 없는지, 피아노도 보컬 레슨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예민보이의 엄살은 민망할 정도로 심각하다. 살짝 긁힌 상처에도 밴드를 찾기 때문이다. 


"밴드! 빨리 밴드 붙여야 돼!" 


나와 S가 별 것 아닌 것으로 가볍게 넘길라치면 "왜 걱정 안 해줘! 아들이 아픈데!"라며 한층 더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다. '우는 아이 젖 준다.'라는 속담이 있다지만, 너무 자주 울면 젖이 안 나올 수도 있다.

 

장난은 예민보이의 일상이다. 문제는, 예민보이 본인이 하는 장난은 장난이요, 나나 남편이 하는 장난과 농담은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가히 '내로남불'의 대명사격이라 할 만하다. 장난이 싸움으로 끝나는 경험을 자주 겪은 뒤로, 우리 부부는 흥이 고조된다 싶으면 브레이크부터 밟는다.   

 

그 외에도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예민함은 더 있다. 버리는 걸 끔찍이 싫어해서 직접 만든 만들기 작품, 종이접기 작품, 작아진 옷 등은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처분해야 한다. 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며, 정리한 카드의 순서를 섞으면 난리가 난다. 저녁 양치는 반드시 온가족이 함께 해야 하고, 티브이를 볼 땐 청소기를 돌리면 안 된다. 노래도 맘 편히 부르지 못한다. 가사나 음이 틀리면 지적하기 때문이다. 자기 기준에 유치한 노래, 예를 들어 뽀로로, 뿡뿡이, 타요 같은 만화주제가는 절대 부르지 못하게 막는다. 뽀로로 옷 입고 뽀로로 과자 먹으며 아장아장 걸어다녔던 건 생각도 안 난다는 듯이.

 

이렇게 적고 보니 가히 대상감이라 할 만하다. 물론 위에 열거한 것들은 나이를 한 살씩 먹을수록 그 정도가 조금씩 둔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부디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상심하지 않길 바란다.  






"엄마?"


아직 대상 수상의 희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예민보이가 나를 찾다. 는 대답을 안 한 채 가만히 있었다.  


"엄마, 어딨어?"


예민보이가 다시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오늘은 스스로 다시 잠드는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나는 남은 맥주를 들이켠 뒤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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