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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 Aug 30. 2024

여기는 지하 100층, 거긴 몇 층인가요?

예민보이는 무럭무럭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후 얼마간은 마주치는 엄마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3학년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생일이 언제예요? 우리 애보다 생일도 늦는데 저렇게 커요? 밥을 잘 먹나 봐요. 영양제 따로 먹이는 거 있어요? 엄마 키는 작은데, 아이가 정말 크네요. 아빠 닮았나 보다…….      


물론 그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면의 성장이 외면의 성장을 뒷받침해주지 못한 예민보이가 교실에서 이런저런 잡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민보이는 맨 앞줄에 서려고 친구와 실랑이를 벌였고, 의도하지 않은 신체 접촉을 때린 것으로 오해해 싸움을 키웠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고 웃었다고, 책상 위에 놓아둔 본인의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그냥 쳐다봤는데 째려봤다고 오해해 ‘과하게’ 화를 내기도 했다.  

   

담임은 그런 문제들로 내게 전화를 걸어오지는 않았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인 데다가 3월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20년 넘는 교직 생활은 담임에게 그런 융통성을 심어준 듯했다. 어쩌면 학부모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거나. 나는 전자라 믿고 싶었다.     


초등학생 1학년은 학기 초 적응기를 갖는다. 물에 녹듯 언제 어디서나 빠르고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순한 기질의 아이와 달리,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은 적응 기간이 무척 길고 험난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좀 적응해 한숨 돌릴라치면, 어느새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방학이라고 마냥 편한 건 아니다. 부모와의 갈등 빈도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온탕 냉탕이 반복되는 다소 극적인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 까다로운 아이들은 또다시 2학기 적응기를 맞이한다.      


맙소사, 2학기 적응기라니!      


다행인 것은 1학기에 비해 2학기 적응 기간이 좀 짧다는 점이다. 물론 뒤이어 길고 긴 겨울방학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러니까 까다로운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초등학교 6년 동안 1학기와 2학기 총 12번에 걸쳐 내용만 다른 ‘새로운’ 적응기를 보낸다. 1학년 1학기 적응기, 여름방학, 1학년 2학기 적응기, 겨울방학, 다시 2학년 1학기 적응기…… 학원까지 다니게 되면, 적응 횟수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 집 예민보이는 매우 예민하게, 그리고 다소 요란하게 초등 1학년 1학기 적응기를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같은 반 아이의 엄마들이 담임과 달랐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예민보이의 적응기를 이해해주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모른 척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대부분 순한 아이를 키우고, 일부는 자기 아이가 순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그녀들은, 예민보이 때문에 반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개중 몇 명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을지 몰랐다.      


우리 애보다 더한 애가 있었네! 정말 다행이야! 하면서.      


고백하자면, 사실 내가 그랬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이런저런 소문들이 귀에 들려온다. 어떤 애가 교사에게 대들었다더라, 누구누구가 화장실에서 다른 반 애와 싸워 난리가 났다더라, 매일같이 지적당하는 아이도 있다더라, 아이들 싸움 때문에 만난 부모들이 놀이터에서 주먹다짐을 했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안도했던가! 예민보이보다 더한 애가 있었네! 정말 다행이야! 하면서.

    

어디 이것뿐이랴. 부끄럽게도,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양육의 여러 난관을 마주할 때마다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그래, 예민보이는 장애도 자폐도 아닌걸. 학교 안 갈 거라는 말은 밥 먹듯 하지, 실질적인 등교 거부로까지 이어지진 않잖아. 문제행동을 자주 일으켜 학교에서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불안에 떠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다른 사람의 불행은 내 불행을 잠시 잊게 만드는 약효 좋은 진통제와 같았다. (부디, 당신에게도 이 글이 진통제로써의 효과를 발휘하기를.)


그러나 예민보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1학기 3월은, 이 같은 진통제의 약발이 듣지 않았다. 불안과 우울이 눈덩이처럼 커져 나를 집어삼킨 탓이었다.


하교시간이 가까워 오면,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두근거리고 숨이 막혔다. 오며 가며 얼굴을 튼 같은 반 엄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물어 날랐던 것이다. “우리 애가 그러는데, 어제 예민보이가……”로 시작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6층에서 지하 10층으로, 다시 지하 20층으로.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인데, 그녀들은 교실에서 발생한 예민보이의 문제행동들을 속속들이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악의는 없었으나, 그것들은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들은 나와 예민보이의 신상에 관해 스스럼없이 질문했다. 어디 유치원 나왔냐, 어디 사냐, 아버님은 뭐 하시냐, 전업이냐, 무슨 일 했냐, 유치원 땐 어땠냐, 욕을 자주 한다던데, 우리 애랑 싸웠다던데 알고 있냐……. 3월의 꽃샘추위를 비웃듯 이마와 양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나는 지하 30층으로 50층으로 쭉쭉 미끄러졌다.      


나는 모르지만, 나를 아는 엄마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엄마들 네트워크를 통해 예민보이와 나에 대한 정보를 얻은 모양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나와 아이를 곁눈질하며 지나쳐 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길 속엔 ‘쟤가 예민보이구나!’, ‘아, 저 엄마가 그 엄마구나!’라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예민보이와 예민보이의 엄마인 나는, 모르는 사이 ‘핫한’ 인물이 돼 있었다. 엄마들의 네트워크는 그런 것이었다.   

       

1년 같은 한 달이 지나, 3월 말이 되었다. 나는 어느새 지하 100층까지 내려가 있었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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