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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 Sep 11. 2024

내 아이가 미워진다

지하에서 바닥을 쓸고 있을 당신에게

지하 100층까지 내려오자, 화가 많아졌고 쉽게 우울에 빠졌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이미 일어난 일을 반추하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두 정신 건강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밥투정한다고 혼냈는데, 괜히 친구들에게 화풀이하는 건 아니겠지? 빵이나 먹여 보낼걸, 뭐 하러 밥은 해서…….

별일 아닌 일로 친구를 때리면 어떡해?

오늘도 친구 엄마에게 연락이 올까?

어제처럼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모자대첩이 일어나면 어쩌지? 과연 내가 잘 참을 수 있을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입덧 때문에 잘 안 먹고, 태교를 제대로 못 해서 그런 걸까? 정말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었나, 진짜 나라를 팔았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하교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아이 픽업을 위해 학교 정문에 서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기도문을 입속으로 읊조렸다. 제발, 오늘은, 친구 엄마들이 내게 아이의 만행(?)을 전하지 않기를, 아무도 나를 곁눈질하지 않기를, 눈에 띄지 않기를, 부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고작 십여 분이었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러다 터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웃을 일은 좀체 생기지 않았다. 조금 더 우울하거나 조금 덜 우울하거나,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달까. 때문에 그 시절 어쩌다 찍힌 사진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웃는 사람들뿐인데, 나는 웃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거의 매일 울었으므로, 마침내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억지로 웃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그땐 그걸 몰랐을까? 그랬다면 예민보이와 나는 조금 덜 힘들었을지 모른다.     


남편은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애 학교 데려다주고 나서 산책이라도 좀 해.”     


어떤 날은 이런 말도 했다.  

    

“너무 힘들면 상담 좀 받으러 갈까?”    

 

상담이란, 정신과 상담을 말하는 거였다. 걱정을 담아 한 말이었을 텐데, 내 귀에는 ‘정신병’이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정신과에 갈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다고 따지듯이 쏘아붙였다. 남편은 더 이상 상담을 권유하지 않았다.


사실 남편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산책이라도 좀 해”, “정신과 상담을 받아봐”라는 따위의 조언들이 화를 야기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을 뿐이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우울증인지 깨닫지 못한다. 우울증이 깊을수록 자주 화를 내고, 그보다 더 자주 무기력해진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이렇다 할 큰 어려움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저 그런 평범한 가정환경과 유년기, 대학생활을 거쳐, 그저 그런 결혼생활에 입문했다. 너무 평범해서 이따금 심심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탈을 감행할 만큼 도전적인 성격은 못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등장하면서, 그 평범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조그마한 아이가 만들어내는 삶의 균열은 실로 대단했다. 밤잠 낮잠이 얕은 예민보이는 수시로 나를 호출했고, 좀 커서는 이유식과 유아식을 거부함으로써 나를 또 한 번 좌절시켰다. 병치레도 안전사고도 잦았으며, 남들 다 가는 어린이집 적응 역시 쉽지 않았다. 예민보이는 어린이집 근처에만 가도 들어가지 않겠다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유치원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차이점이라면 이때부터 자잘한 잡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예민보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점점 더 버거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동정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게 충고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나를 비난했다.


어떻게 키우길래 애가 저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 속엔 그보다 더한 말들이 내포돼 있었다. 나는 동정도 비난도 받지 않았던, 오롯이 내 이름으로 평가받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리움이 커질수록 예민보이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세상에, 제 아이가 밉다니!    

  

혹자는 제 뱃속으로 낳은 아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느냐며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정말 미웠다. 문제 행동을 할 때마다 자꾸 더 미워졌다. 나는 모성 없는 엄마였으니까.   

   

‘내가 때린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지? 나는 그냥 걔 엄마일 뿐인데, 왜 내가 죄인이 돼야 하냐고!’      


어느 순간부터 미움과 함께 억울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그 억울함은 고스란히 예민보이에게 전달됐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기질이 까다롭고 예민한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화가 싸움을 키우는 발화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잘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괴리가 있었다. 특히 육아와 양육의 영역에서는 더더욱.    


나는 자주 예민보이에게 화를 냈다.  

    

“별 것 아닌데, 왜 그렇게 따지고 드니? 그러니까 친구들이 싫어하잖아! 같이 놀려면 양보도 하고 이해도 해야지. 왜 항상 너 중심으로만 생각해? 절대 밀거나 때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같은 반 엄마들에게 한소리를 들은 날엔, 더 심하게 아이를 몰아세웠다.


“네 때문에 엄마가 대신 사과했어. 너 때문에, 내가……! 이제껏 죄지으며 살아오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돼? 일까지 그만두고 너 키우고 있잖아. 내 인생 포기한 채, 너 사람 만들려고 애쓰고 있잖아!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네가 뭔데?!”    

 

아마 더한 말도 했을 것이다. 엄마들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나는, 다시 말로써 예민보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엄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착하게 굴게. 울지 마, 엄마…….     


날이 선 말을 퍼부으며, 나는 제발 예민보이의 입에서 이 같은 말이 튀어나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그것은 헛된 기대였다. 예민보이는 나보다 더 큰소리를 냈다. 걔가 먼저 밀었다고, 걔가 나만 빠지라고 얘기해서 화가 났다고 소리쳤다. 가만히 있는데 걔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예민보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오직 하나였으니까.


잘못했어,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   

  

공을 받아넘기듯, 상처는 내게 왔다가 예민보이에게 갔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럴수록 나는 강스파이크로 응수했고, 이에 질세라 예민보이 역시 수위를 높여 악악거렸다.   

   

우리는 그렇게 지옥 같은 3월을 보내고 4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지하 100층까지 떨어져 본 사람은 안다. 지하 100층에서는 화내고 울고 소리치는 것 외에, 다른 걸 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예민보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1학기 3월을,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화내고 울고 불안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음자리에 떨어진 상처들에서 피가 나고, 아물고, 다시 피가 나길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예민보이 엄마, 왜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혼자 바닥을 쓸고 있어? 그만 올라와.”     


그녀는 예민보이 반 친구의 엄마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또래 친구 엄마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몹시 기다려왔다는 것을! 지하 100층은 너무 춥고, 너무 외로웠으니까.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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