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매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 좋은 로스쿨, 좋은 로펌에 가기까지 매번 나에게 과분한 것들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노력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이 일은 생각보다도 나랑 잘 맞는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변호사는 글로 먹고사는 직업이니까. 로펌에서도 나름 글 좀 쓴다 소리를 들으면서(혹은 어쩌면 그 말을 듣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삶이다.
'나 잘 살고 있나?'
밤낮없이 산 덕에 로펌에서도 인정받으면서 나름 또래 중에 성공한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아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여기까지 오게 한 결정적인 선택들이 모두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인 건 아닐까. 사실 20대 후반부터 어렴풋이 느꼈고, 조금씩 때때로 불안했다. 서른이 되니까, 참 나이는 별거 아니라고 하는데 앞자리가 바뀌니 조금 더 싱숭생숭해졌다.
그래서 딱 서른이 된 작년부터 '나'를 알려고 노력해 봤다. 그러고 보니 정작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를 위해서 사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고민해보지 않은 채 그저 '남들이 보기에' 좋은 것들을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하고 있었음을 매 순간 절실히 깨달았다.
'아 그래서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구나' 나는 '나'가 아닌 '상황'을 좇았던 걸지도. 그러니 매 상황 열심히 살았음에도, 뭔가 '나의 선택'이 아닌 '운'이라고 치부했던 것 같기도.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뭘 해도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던 내가 '나 좋은 것들'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저것 해보다 보면 어느새 나도 '나'로 형형색색이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자랑해 보자면, 작년에 나는 훌라댄스와 연극을 했고, 나름 뷰티 프로필도 찍어봤다. 내 주변 모두가, 내가 그것들을 했고, 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프로필 사진은 조금 부끄러워서 별스타그램 프로필 작은 화면에 넣어두고, 나머지는 혼자 간직하고 있다)
나의 30대는, 지금까지의 나와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고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니까. 그 말을 믿어보면서, 안 하던 짓?들을 해보고 모르는 것들에 도전하면서. 마치 걸음마를 하는 기분.
브런치에 누구보다 먼저 자랑해야지. '저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첫 번째로 자랑할 것. 소극장 연극 무대에 올랐다는 것.
지난 일요일 내 생애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다. 소극장을 빌려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연극을 했다. 연극 <안네의 일기> 무려 첫 연극 시도부터 장막이라니. 그럼 지난 일요일 내 인생 첫 연극 <안네의 일기> 부터 자랑하고 싶다. 연극이 <안네의 일기>니까, 일기장 쓰듯이 반말로 써볼게.
2024년 2월 18일 일요일. 안녕 일기장아.
오늘은 지난 11월부터(첫 연기수업은 7월!) 긴긴 대장정을 거쳐, 내 인생 첫 연극 데뷔를 한 날이야. 데뷔, 그것도 연기를 하다니 너무 신기해. 지금도 얼떨떨해 내가 이걸 해냈네? 하고 말이야.
솔직히 지난해 마음이 좀 힘들었거든. 내가 나로 산 지 30년인데, 난 왜 아직도 나 자신을 잘 모를까. 주변에 좋은 것들, 좋은 사람들 많은데도 정작 ‘나’는 채워지지 않는 기분? 나름 열심히는 사는데 방향을 모르겠고, 방향을 모르니까 무작정 열심히는 해보는데 계속 답답하고 공허한 느낌?!
그러던 중 7월 술김에 ‘하 내 인생 좀 달라지고 싶어!!’ 하면서 처음으로 한 달짜리 연기 워크숍을 질러버렸어. 다시 생각해도 그건 작년의 내가 참 잘한 선택이야. 바쁜 와중에도 그 수업을 들으러 가는 그 길이 너무 행복했거든. 해보니까 나는 생각보다도 관종(?)이더라고! 한 달 수업을 들었는데 아쉬운 거야,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다음 수업을 결제하고, 킹콩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그릇이 큰 선생님과 멋진 동료들을 만났고, 어느새 소극장 연극을 3개월간 준비하는 반까지 질러버렸네!
그 결과 오늘 무려 3시간 동안 ‘안네의 일기’라는 연극을 했어(3시간이라니….!) 연극은 사실 실수도 많았지만 끝까지 모두가 진심을 다해서 완주한 것 자체로 너무 너무 너무 기특해. 무대를 결국 해낸 나 자신도 난 정말 대견해. 미프역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 미프처럼 정직하고 다정하게 ‘나의 신념‘을 위해서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니까.
연극을 마친 지금 조금 알 것 같기도 해!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이 어떤 건지, 어떤 삶이 나다운 삶에 가까운 건지. 온전히 ‘나답게 살아있는’ 하루가 잘 없던 요즘이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하루였던 것 같아. 그래서 연극이 끝나고 눈물이 많이 났어!
소극장 연극을 올리면서 만난 드물게 순수하고 열정 있고 다정한 우리 동료들에게 감사를, 애정 어린 눈으로 한 명 한 명 살펴주던 킹콩 선생님께 존경을 보내. 바쁜 와중에 오늘 공연에 와준 친구들까지, 따뜻하고 행복하게 반짝이는 시간을 만들어줘서 대단히 고마워.
오늘 받은 그 기운들로 2024년을 ‘나다움’을 잘 찾아가는 한 해로 만들 거야. 앞으로 인생도 나답게 만들어 가야지! 빠샤!
(아래는 <안네의 일기> 무대야. 안네의 가족들과 판단 가족, 뒤셀까지 총 8명이 2년간 은신처에서 살았다는데, 그 은신처의 구조대로 만들었어. 나중에 안네의 집을 보러 네덜란드에 가보고 싶어)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안네의 일기>처럼 써보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내 30대의 걸음마들을 조잘조잘 친구에게 떠들고 싶은데 말이야. 그럼 안녕, 다시 만나. 일기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