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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랏차차 Jun 23. 2024

20킬로 배낭을 메고 노고산에서 보낸 1박

자연 그대로의 자연

안녕 오랜만이야 일기장아, 6월 초 노고산에서 1박을 한 이야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시 또 백패킹이 하고 싶어. 2주가 지난 지금도 휴대폰 갤러리에 저장된 그날의 사진들을 열어 보면서 힐링하는 중이야. 나 알고 보니, 자연을 좋아하고, 땀을 흘리는 것도 좋아하네!


자연이 주는 감각적인 순간들이 있어. 갓 태어난 나뭇잎이 연한 초록색인 걸 발견할 때, 선선한 바람에 나뭇잎이 햇살에 일렁일 때면 길을 걷다가도 기분이 좋아. 그런데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주는 순간들은 조금 더! 좋은 것 같아. 제멋대로라서 좋아.


탁하지 않은 흙냄새,
나무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는 햇살과 그림자,
제멋대로 뻗어도 잘려나가지 않은 나뭇가지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한 판례집'에 자연과 백패킹을 승소판례로 추가하겠어.

원고 자연, 원고 백패킹 인용(땅땅!)




지난 6월 초, 영감님(inspiration)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와 차를 끌고 양주 노고산에 가서 1박을 하고 왔어. 체감 20kg는 넘기는 미쳐버린 배낭을 메고 말이야. 낮에 비가 와서 백패킹 갔다가 다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자 거짓말 같이 날씨가 좋아졌어.


1시 정도에 집을 나서서 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마트에서 이것저것 짐을 사서 양주로 가니, 벌써 4시를 넘긴 시간이었어. 바쁘게 등산을 시작했어. 배낭은 무겁고 노고산 산길이 가팔라서 올라간 지 30분 만에 땀으로 흠뻑 젖었어.


볕뉘  : 1.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빛, 2.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3.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      


4시를 넘긴 시간이라 해가 살짝 누었어. 뉘엿뉘엿 지는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치고, 흙위로는 그림자가 지더라. 영감님 말이, 그건 볕뉘라고 한대. 볕이 누워서 볕뉘.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이라는 뜻이래. 이걸 표현하는 우리말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야. 볕뉘와 산소리, 산냄새가 좋아서 오르는 길이 견딜만했다.  



한 시간 즈음 올라서 쉬려고 등산로 옆으로 난 작은 샛길로 들어갔어. 나무에 둘러 쌓여서 보이지 않던 전망이 보이더라. 배낭을 내려놓고 '이야 엄청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지. 다시 짐 싸서 오르는데, 아니 얼마 안 가니 대놓고 잘 만든 바위 전망대가 있었어. 조금만 더 올랐으면, 큰 바위에서 앉아서 조금 더 멋진 뷰를 편하게 보았으려나 싶다가, 둘이서 '이것이 바로 인생이지~'하고 웃어버렸어. 딱딱 맞는 것보다 조금씩 어긋나는 순간들이 바로 인생의 묘미지!


무거운 배낭에 힘이 들 때는 잠깐 풍경을 보고, 산바람에 땀을 식히고, 그렇게 기운을 조금 차리면, 다시 산을 올라갔어. 그저 발걸음을 딛고 산을 오르는 데에만 집중하는 시간은 생각보다도 더 자유로움을 주더라.



정상은 생각보다 바쁘다


정상에 다 오르고 난 직후에는 몸이 녹초가 되어서 텐트고 뭐고 그냥 던지고 바닥에 누웠어. 하늘은 정말 이쁘고 바람은 시원하고 나무는 초록초록하고. 그 순간이 생생해.


가방에 짊어지고 온 텐트, 테이블, 의자를 다 펴고 나니, 그것도 그것대로 꽤나 뿌듯해. 그날 하루 우리가 지낼 보금자리를, 우리가 정상까지 짊어지고 올라서, 우리가 직접 손으로 설치하고, 그곳에 쉰다는 것 자체로 해냈구나 싶어!


정상에서 시가지까지 다 보였어. 비가 온 이후여서 미세먼지들이 적어서 그랬나 봐. 정상에서 보는 일몰은 아름다웠고, 정상에 서로 다른 색상으로 펴 있는 텐트는 꼭 행성들 같았어. 이걸 텐풍이라고 한대. 텐트 풍경의 줄임말이겠지?



텐트 치고 짐 풀고, 식사하고, 일몰 보고, 자리 정리하고 나니 잘 시간이야. 텐트 안에서 보려고 가져간 책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냥 바로 잠에 들어버렸어.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일출을 봤어. 비 온 다음 날 습기 때문인지 옆 산에 구름이 깔려있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구름인지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구름. 파도치는 모양의 구름도 있었어. 장관이었지.



LNT : leave no trace(흔적을 남기지 않기)


다시 못 잔 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미 정상 위에 설치된 텐트들의 2/3가 떠난(!) 상태였어. 나머지 1/3은 짐 정리를 하고 있었어. 아침 등산객이 정상에 오기 전에 마치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것처럼 자리를 비우는 것이 백패킹의 미덕이라고 해. 우리도 부랴 부랴 짐을 정리하고, 어젯밤의 쓰레기들은 가져간 쓰레기봉투에 다 담아서 하산했어.


LNT는 불편한 일이야. 먹은 음식물은 남기지 않아야 하고, 심지어 볼 일도 흔적을 남기면 안돼(그래서 백패커들은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최소한의 간편식만을 먹는다). 첫 백패킹인 나에게 LNT는 생각지 못한 불편함이었어.


그럼에도 나는 백패킹의 이 LNT 정신이 마음에 들어. LNT는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하룻밤이었는데도 쓰레기가 꽤 나오더라. 나름 쓰레기를 최소화한 짐이었는데도 말이야. 나의 무심함이 자연, 자연과 함께하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 모든 쓰레기를 싸서 내려온다는 것, 내가 쉬고 가는 자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당연한 것을 이제야 마음으로 느끼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 자연에게 조금 더 친절한 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

지난날의 나야, 무지하고 무심했음을 반성해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또 백패킹을 하러 가고 싶다. 어느새 날이 많이 더워져서, 산패킹은 어려울 것 같아서 조만간 섬패킹을 갈까 해! 그리고 날이 다시 또 시원해지는 가을에 영감님과 또 산패킹을 가야지!   


잘 쉬고 갑니다. 고맙다 노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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