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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랏차차 Jul 28. 2024

잃어버린다는 것

사실 잃어버린 것은 없다.

안녕, 일기장아. 

오늘은 지난 몇 개월 내가 몇 번을 생각한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후회에 관한 이야기야.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아서, 브런치를 쓰기가 어려웠는데. 최근 희곡집을 하나 읽었어. 그 덕에 이 글을 드디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창작집단 독이 만든 <당신이 잃어버린 것>이라는 희곡집이야. 


책, 글(브런치도!)은 내가 어렴풋이 느끼지만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말해주고, 나는 그걸 읽으면서 '아 내가 이 말이 하고 싶었구나, 이거였어' 깨닫잖아. 나에겐 이게 글을 읽는 큰 묘미야.


이 희곡집도 그랬어. 나는 후회가 두려워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몇 개월을 보냈거든. 그런데 이 책은 잃어버린 것은 결국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래. 그리고 그걸 짊어진다는 건 불행한 것도 아니래.


언제나처럼 오늘 이야기도 지극히 개인적이야. 



망각이 진화를 결정한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에 실린 희곡 중에서 고재귀 작가님이 쓴 <망각이 진화를 결정한다>는 희곡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어.


사람들이 반쯤 휴머노이드가 된 미래 어느 시대, 우주선착장을 배경으로 해. 이 시대에는 원하지 않는 기억은 헬멧에 있는 LOST 버튼을 눌러서 다 사라지게 할 수 있어. 극 중 인물인 강일호는 부정적인 기억을 LOST 버튼을 눌러서 없애버려.


강일호: 감정의 소비라는 게 사실 생산적인 건 아니잖아요. 울고, 불고, 짜고, 주저앉고.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 난 후)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대표적이죠. 그런 감정은 앞으로 나가야 하는 진화의 과정에 걸림돌일 뿐 인간의 새로운 곳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니까. 말 그대로 진화에 방해만 될 뿐이죠. 


이 미래 시대에는 타인의 기억을 메모리칩으로 만들어서 마치 나의 것처럼 볼 수 있어. 강일호는 재난(세월호)으로 사랑하는 딸을 떠나보낸 엄마의 기억을 담은 메모리칩을 우연히 만난 서윤지에게 건네받아. 그 기억을 읽어보고서는, 기분이 나빠졌다고 화를 내며 곧장 LOST 버튼을 눌러버려. 기억을 지운 강일호는 서윤지를 처음 만날 때처럼 인사를 해. 서윤지는 그런 강일호를 보면서 "언젠가는 후회할 거예요"라고 말해.


하지만 과연 강일호는 후회할까? 후회할 수 있는 기억조차도 사라져 버려서 후회할 일이 없을 텐데. 후회는 언제나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니까. 



후회는 나의 가장 큰 두려움


지난 몇 개월 꽤나 심란한 시간이었어. 감정소비가 많았어. 브런치도 쓸 힘이 안나더라. LOST 버튼이 있다면, 눌렀을지도 몰라. 과거의 인연을 놓지 못하다가 다시 만나서는 다시 또 헤어짐을 고민하고, 지금 다니는 로펌을 다니는 것이 내 행복인지 고민하고, 과거의 나의 선택을 부정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나다운 선택은 무엇일지, 과연 나다운 게 있는 건지 모르겠더라. 내가 나를 모를수록 내가 제대로 선택하지 못할까 두려웠어.


그렇게 나의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미래의 선택도 후회하게 될까 걱정하면서, 계속 침잠하는 것 같은 하루들이었어. 지난 몇 개월을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 않고 그냥 내 방 안에서, 답답하고 정체되어 버린 것 같은 내 삶을, 몇 번이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면서 곱씹었던 것 같아. 생각이 계속 꼬리를 물어서, 머릿속에 스위치가 있다면 잠깐 꺼두고 싶을 정도로.


결국 뭐가되었든 정리를 해야겠구나 싶어졌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더 좋을지, 우선 내 마음이 가는 쪽으로 결정하자 생각했지. 내가 중요한 것을 내 삶에서 영영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두고두고 후회하지는 않을지, 조금 더 노력한다면, 아니 노력을 다른 방식으로 한다면 결국 해결될 문제는 아닐지 걱정되었어. 그렇지만 선택은 해야겠다 싶었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병이 나겠구나 싶었거든.


당장 퇴사를 할까? 퇴사라도 하면 내 인생 뭔가 달라질까? 고민도 했지만, 어렴풋이 퇴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내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어. 터져버리듯이 이별을 했어. 당장은 숨이 트이지만, 앞으로 닥쳐올 후회가 걱정됐어. 



결국 흔적으로 남아, 모두 짊어지는 것


<망각이 진화를 결정한다>는 희곡으로 돌아와서, 망각이 진화에 이로울까?


부정적인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원점을 제자리 걷기 하는 것은 아닐까. 부정적인 기억은 그 자체로는 아픈 것이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망각은 진화를 결정한다는 말이 맞을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을 망각하는 것은 진화를 방해할 수도 있겠어.  


나는 요새 과거의 선택들을 되짚어 보고, 그 선택의 이유들을 생각하고, 그래서 지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있어. 


그러다보니 어느새 퇴사를 고민하고 있어. 지금 이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삶을 이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확신이 되어가고 있거든.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일궈야 하는 것들이야. 아 언젠가는 퇴사해야지 했는데, 요새 급속도로 당겨지고 있어 그 시기가. 올해 안에 퇴사할지도 모르겠네. 지금 회사는 나에게 많은 이로움을 주지만,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주지는 못해. 내가 원하는 삶은 미지의 영역에 가능성으로만 있어. 요새는 두려움 보다는 설렘이 더 큰 것 같아.


아, 며칠 전에는 집안 대청소를 했어. 내 서랍 곳곳의 잡동사니들을 꺼내서 그중 내가 버려야 할 것, 그래도 아직은 가지고 있고 싶은 것들을 가려냈어. 곳곳에 추억인지 미련인지 모를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버렸어. 20리터 쓰레기봉투가 꽉 찼어. 그렇게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면서, 내가 이 집에 이사 온 이후로(약 1년 반에 불과함) 이런저런 일들이 나에게 많았구나 하고, 마음이 콕콕 찔렸어. 


만일 나에게 LOST 버튼이 있다면, 나는 누를까? 


지금의 나로서는, 어느 경우에도 누르지 않을 것 같아. LOST 버튼을 누른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야. 내가 잃어버린 것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기억이든, 결국 다 '나'니까.  언젠가는 흐릿해져 버릴 것들 일지라도, '나'의 어딘가에 다 남는 것 같아.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 저편 어딘가 혹은 내 신념 창고 어딘가. 내 의식과 무의식에서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되는 거야. 그 과정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면, 그건 잃어버린 게 아니야. 과정으로 남아있는 거지.


어리석고 철없는 나를, 나는 기억해. 나를 지나간 많은 인연들도 기억해. 지금은 생생하지만, 언젠간 지금의 일들도 흐릿해질 것임을 알아. 


나는 그것들이 기억 저편에서 흐릿해지기까지 그 기억들을 짊어지고 또 선택들을 할 거야. 내 잘못을 반추하면서 고쳐나갈 거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겠지. 후회가 두려워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삶보다, 후회를 짊어지고서 계속 선택하면서 나를 만들어 나가고 싶어. 요새는 후회도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어. 


참, 살아도 살아도 인생 어렵고, 생각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선택할 것도 많구나! 그럼에도 충분히 나를 돌보면서, 후회가 아닌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겠다. 지금 이 시간이 결국 나를 채우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어. 


나의 부끄러움도, 후회도, 마주하고, 반성하자. 


나의 선택들을 짊어지고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잘 꾸려나가자.


정체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나의 30대. 영원한 것은 없잖아. 천천히 천천히 진화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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