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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랏차차 Aug 10. 2024

퇴사, 저질러버렸다!

내 인생 어디로 흘러가려나

일주일 전 금요일 아침 9시,

우리 로펌 소송그룹장님(사기업으로 치면 00 본부장 정도 되지 않을까)과의 면담 시간,

"저, 퇴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결국 꺼내버렸다.



매번 휴가는 해외로 다녀왔다. 변호사 업무가 워낙 바쁘다 보니 제대로 된 휴식은 여름과 겨울 휴정기에 가질 수 있다. 여름 휴정기에 해외에서 푹 쉬고, 돌아와서 바로 겨울 휴정기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다시 다음 휴정기 전까지 비행기 표를 보면서 열심히 달린다.


그런데 로펌 3년 차, 이번 여름 휴정기는 처음으로 오롯이 국내, 그것도 본가에서만 보냈다.


이번 휴가는 시작하기 전부터 '퇴사시기를 결정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마음속의 퇴직일 후보는 '2월 말'(만 3년을 채운다는 이점이 있음), '9월 중순'(추석 연휴 즈음부터 남은 하반기를 쉬고 1월 1일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음)이었다.


이번 휴가 기간 동안 내가 언제 퇴사를 할지 제대로 정하고, 그때까지는 열심히 회사를 다니겠다고 마음먹었다. 또한 퇴사를 한 후에는 무엇을 하며 쉬고, 언제부터 개업변호사로 일할지, 나는 어떻게 수임하며 먹고살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삼자는 마음이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이번 휴가는 본가로 간다고 하자 어떤 선배 변호사님은 '어느새 어엿한 중견 변호사가 되었구나, 중견 변호사는 해외 나갈 힘이 없어. 나도 그냥 국내에서 쉴 거야'라면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내비쳤다. 그게 아니라, 저는 퇴사 결정 때문이었는데요, 변호사님...




본가로 내려가는 월요일, 기차 시간이 꽤 남아서 용산역 영풍문고에 잠깐 들렀다.


자기 계발 스터디 친구들에게 추천받은 책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매트 헤이그)를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발견했다. 인생이 고민될 때 참고하는 책이라고 무려 7명 중에 2 명이나 추천을 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기차 타고 내려가는 길 읽기 딱이겠구나 싶어서 샀다.


그렇게 기차에 타서 첫 장을 열었을 때, 마법 같은 문장이 있었다. 이걸 읽은 순간 이미 어느 정도 내 마음의 방향은 정해져 버린 것 같다.


나는 결코 되고 싶은 사람이 다 될 수 없고, 원하는 삶을 모두 살아볼 수도 없다. 원하는 기술을 모두 배울 수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러길 바라는가? 난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식적 육체적 경험의 모든 음영과 색조와 변주를 살아내고 느끼고 싶다.
- 실비아 플라스



빠르면 9월 추석 정도 퇴사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부모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이미 올해 초부터 개업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어서 놀라지는 않으셨다. 다만 내가 2월 말까지는 다니길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부모님이 '2월 말은 어떠냐'는 말을 꺼내자, 내 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면서 하루라도 어릴 때 도전하는 게 맞지 않냐고 구구절절 어느새 부모님을 설득하고 있었다.


2월 말까지 다니면 대형로펌 경력을 만 3년을 채우고, 양질의 대형 사건을 조금이라도 더 수행한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앞으로 개업하게 되면 다시 하기 어려운 사건들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사건의 크기나 내가 수행하는 역할 등에서 지금의 삶이 개업 변호사의 삶과 꽤나 차이가 있다는 면에서는, 내가 개업 변호사로 하루라도 빨리 부딪히는 게 이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예전처럼 회사 일에 몰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 일을 꽤나 열심히 몰입해서 하는 편이었는데, 요 근래는 그러지 못했다. 이미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어서 그런 것 같다. 나의 이런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들어서 9월 추석 정도에는 퇴사하는 것이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부모님에게 말했다. 부모님도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사실 부모님만 앞에 앉혀 놓았을 뿐, 내가 설득한 대상은 부모님이 아니라 '내 안의 불안‘였다.



사실 이미 마음속으로 '퇴사하고 파리 한달살이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전마다 에어비앤비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래도 휴가 기간 쉬다 보면 2월 말까지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으니까 꾸역꾸역 마음을 누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도 이 마음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나 자신과의 씨름 끝에,

휴가 마지막 날인 목요일 아침, 나는 9월 추석 무렵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남은 것은 회사에 어떻게 말을 하느냐였다.


내가 퇴사를 말씀드려야 하는 분, 바로 우리 그룹장님은 쓴소리를 직설적으로 하는 분이어서 회사에서 꽤나 무섭기로 유명하다. 퇴사를 한다고 하면 곧바로 한 소리 듣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휴가 마지막날인 지난주 목요일 오후, 그룹장님에게 바로 면담 요청 메일을 보내기에 앞서 일단 그룹장님의 담당 비서님께 메일을 보냈다.


"00 팀장님께, 그룹장님과 면담을 내일 ~ 다음 주 중에 하고자 합니다. 그룹장님 휴정기 휴가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보통 비서님들은 메일 회신이 굉장히 빠른데 2시간이 지나도록 회신이 없었다. 그리고 2시간 후, "내일 오전 9시에 내부회의 예약했습니다."는 회신이 왔다. 퇴사 통보가 24시간 내로 정해졌다.


매번 고민하면서 잠드느라 잠을 설쳤는데, 목요일에는 잠을 푹 잤다.



금요일 아침 9시 그룹장님과의 면담 시간,


무슨 일로 면담을 잡았냐는 그룹장님의 말에 "퇴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퇴사하고 '싶습니다'라는 말보다 더 굳은 의지를 담고 싶어서 고르고 고른 문장이었다.


잠깐의 정적 후에, 그룹장님이 "이직할 곳이 정해진 건가?"라고 물으셨다.


"아니요, 이직이 아니고, 내년 1월에 개업하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 만나고 여행도 다니면서 쉬고, 개업 준비할 생각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역시 전날 밤 고르고 고른 말이다.


그 이후부터는 준비된 답변이 아니라, 그룹장님이 물어보는 이런저런 질문들에 그때그때 대답했다. 같이 개업할 사람은 정해진 건지("아니요."), 개업할 사람은 찾는 중인지("몇 사람 만나보면서, 개업 이야기는 해보고 있습니다."), 휴가기간에 본가를 갔다던데 부모님과 이야기하고 온 건지("예전부터 개업에 관하여는 말씀 드려 왔고, 제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이 되자, 그룹장님은 "설득의 여지는 있나?"라고 물어보셨다.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습니다. 제가 미혼에 아이도 없는 지금 더 늦기 전에 도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잠깐의 침묵 이후 그룹장님은 "조금 질투가 나네, 젊을 때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도전한다는 게. 이 나이 먹으면 뭔가를 하기가 어려워."라고 말문을 열었다. "나가서 더 큰 사람이 돼라"는 덕담까지 해주셨다. 그룹장님에게 한 소리 듣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들어갔는데, 따뜻한 말과 조언에 뭉클했다.


그렇게 문을 닫고 나오니, 대략 2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지난 몇 개월을 상상해 오던 순간인데, 퇴사 통보의 순간은 찰나였다.


그로부터 약 15분 후에 시니어 변호사님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 우리 그룹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내가 퇴사 통보했다는 내용의 내부 공지 메일이 돌았다고 했다.



지난 금요일부터, 나의 퇴사 소식을 들은 주니어, 시니어 변호사님들이 하나둘씩 전화를 하고 집무실에 찾아왔다.


평소 내가 개업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몇몇 동기들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선배, 후배 변호사님들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놀라는 반응이었다. 올 초부터 고민해 오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자, ‘좋은 인재를 놓쳤다'라고 아쉬하면서도 '결국 잘할 거다'라면서 응원해 줬다. 그 마음들이 모두 진심인 것이 느껴져서 '아, 그래도 내가 지난 3년 가까이 이 회사에서 열심히 잘 해왔구나' 싶어 뿌듯했다. 한편에는 내가 아직 회사에 대한 마음과 에너지가 있을 때 나가서, 그래도 이런 좋은 이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많은 변호사님들이 '참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말해주셨는데, 물론 용기를 낸 건 맞지만, 내 생각보다도 더 많은 분들이 정-말 용기 있다고 놀라워하니 '아니, 이게 그 정도 일인가?' 싶어서 도리어 덜컥 겁이 나고는 한다. 그럴 것이, 이곳에서 받는 만큼의 월급을 내가 개업변호사로는 벌지 못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사람이 더 이상 아니니까 불안정할 것이다.


최근 내가 고민이 너무 많으니까 친구가 해준 조언이 있다. 스스로를 잘 못 믿겠을 때는, 본인을 믿는 주변 사람들을 믿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잘할 거라는 친구들의 말, 선배, 후배 변호사님들의 말을 믿어야지.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


퇴사 통보 후 당장 곧바로 개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9월 추석 전까지 진행 중인 사건들, 특히 내가 주로 수행해서 내가 서면을 쓰고 가야 할 사건들을 내 선에서 최대한 잘 마무리하고 인수인계해야 한다.

9월 말 퇴직 이후, 10월 중순에 있을 나의 두 번째 연극 공연을 열심히 준비할 예정이다.

10월 중순 연극이 끝나면 그 직후 프랑스 남부 렌터카 여행을 2주 간 떠난다.

11월부터는 파리에서 한달살이를 할 것이다(이미 방도 구했다).

12월 귀국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개업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이다.

이렇게 써 놓고보니 이미 올해 일정은 아주 아주 빼곡하다! 이 시간들로 내 안의 에너지를 채워 넣어야지.


내년 1월부터는, 개업 변호사로 살겠구나. 하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불확실성'이 있는 곳에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걱정보다는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새로운 경험들을 기대해야지.


난 내 잠재력을 믿는다. 내 인생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번 보자! 가보자, 개업 변호사!



p.s. 퇴사 통보를 한 당일 로스쿨 스터디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다음 날 늦게까지 자다가 깼는데, 지난 밤 친구에게 퇴사 선물로 받은 꽃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취한 상태에서 꽃을 다듬고 화병에 물을 담은 기억이 난다. 친구의 센스와 전날 약간의 노동? 덕분에 아침부터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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