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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랏차차 Aug 27. 2024

타고난 결대로 사는 것

인생 2막을 앞두고 하는 결심

타고난 결


직선과 곡선


지난 주말 만삭의 친구 D(배가 산처럼 불러서 이니셜은 D)의 집에 놀러 갔다. D는 로펌 동기인데, 1년차에 같은 2인실에 배치되어 1년간 밤낮없이 붙어 있었다. D의 첫인상은, 자세가 바르다는 것이다. 자세만큼이나 사람에게서 건강하고 꼿꼿한 힘이 있다. D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언니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의지가 된다.


D는 입사를 한 첫 해 바로 결혼준비를 하고 딱 2년 차 초에 결혼을 했다. 2년 차 말에 딱 임신을 하고, 3년차인 이제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 나는 D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동안, 몇 번의 이별을 했다. 결혼은 커녕... 당분간은 연애도 할 마음이 없다.


D가 휴직을 하고 3주가 지났다. D의 집에 가니 불과 3주 사이에 그녀의 배가 산처럼 불렀다. 휴직할 때 배를 보면서도 여기서 배가 어떻게 더 부르나 했는데... 무튼 그녀와 종종 톡을 할 때면 집에서 내가 출산선물로 사준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읽는 중이라고 했다. 집에 가보니 그 책을 어찌나 열심히 읽었던지, 벌써 800쪽을 읽고 있었다.


삐뽀삐뽀 분량이 어지간한 민법 기본서에 준한다.


나는 D에게 그간 밀렸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내가 그녀에게 요새는 내 인생을 다시 0에서 시작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진로(변호사 외의 진로까지)를 고민 중이라고 하자, 그녀는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봤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너는 공부하다 동기부여가 안되면 어떻게 해?'라고 물으면, 나는 난감했어. 그런 적이 없었거든. 그냥 했을 뿐이었어."

"D야, 새로운 걸 해보고 싶지는 않아? 나는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나는 그냥 지금 나의 영역을 지키면서 사는 게 좋아. 호기심이 안 생겨“


그녀에게는 하던 것을 꾸준히 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다른 것들에 눈길도 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매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내가 신기하다. 반면 나에게 '큰 생각 없이 그냥 하면 된다'는 D의 말은 대단하다. D처럼 꾸준하게 한가지를 해내기 위해서는, 나에게 동기부여가 매우 중요하다. 동기부여가 되면 몰입하여 단기간에 성과를 낸다. 그러나 동기를 잃으면, 쉽게 포기하고 다른 것을 찾는 경향도 있다.


우리 둘은 로스쿨, 변호사라는 같은 길을 걸어왔지만 과정은 굉장히 다르다. 로스쿨, 로펌에 오기까지 D는 뚜벅뚜벅 직선으로 왔다면, 나는 PD, 기자, 창업 등 샛길로 빠졌다가 흐르듯이 로스쿨을 들어가고, 가서도 이 길이 맞나 비틀대며 가던 길이었다.


D와 나의 지금 종착지는 같지만, D는 직선으로, 나는 비틀대는 곡선(그래도 직선에 가까운?!)으로 왔다.


나는 직선으로 걸으려는 곡선의 인간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D와 같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거니까. 싫어하는 공부는 '이걸 왜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푹푹 올라와서 힘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진득하게 별생각 없이 공부하는 친구를 보면 신기했다. D에게 '너는 동기부여를 어떻게 해'라고 물어보던 그 친구의 마음도 정확히 알 것 같다.


예전에는 이럴 때마다, ‘내 의지가 약한가. 내가 이것저것 욕심이 너무 많나. 나는 왜 남들처럼 그냥 만족이 되지 않고, 자주 다른 것들을 돌아보고 둘러볼까.' 부정적인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는 좌우로 틀어지는 마음을 다 잡으면서, 어떻게든 직선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작년부터 다시 방황이 시작되었다. 업무도 잘 맞고, 직장 사람들도 다 좋은데(물론 업무량이 많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이 쉽게 해결되지 않으니 속이 정말 답답했다.


그러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심리 검사를 받아봤다. 나라는 사람을 알아보고 싶었다.


TCI 기질 및 성격 검사 결과, 나는 자극추구가 상위 8%에 이르는 것으로 나왔다. 그 아래 하위 척도가 있는데, 탐색적 흥분(<->관습적 안정성)이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상위 5%?)였다. 반면, 위험추구는 상위 50% 정도에 불과하다. 새로운 것에 관심은 많지만, 위험을 그다지 감수하는 편은 아니다.


이 결과를 보자, 그간 나의 선택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왜 내가 학부에서 PD, 기자, 창업, 국회, NGO 등 여러 활동을 했는지, 그러면서도 왜 결국 로스쿨과 변호사라는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변호사가 되어서는 특수 분야보다는 여러 사건들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송무팀을 선호했는지.


검사 결과를 설명해 주던 상담선생님께서 이건 모두 '타고난 것'들이라고 했다. 잘 바꿔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 어쩔 수 없구나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 한 채찍질들이 미안해졌다. 곡선의 인간이 직선의 길을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지금껏 꾸준히 해냈다는 것이 기특해졌다.


D와 나는 다르다. 다를 뿐,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아니 부족하더라도,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나다.

내가 곡선의 인간임을 인정하면서부터, 드디어 직선 밖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의 2막을 시작하면서


내가 '나'를 알아주려 노력하기 시작한 지 불과 1년 사이, 내 삶이 급격히 바뀌었다.


내 주변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채워져 가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시간도 생겨났다(음악을 들으면서 브런치 쓰는 바로 이 시간). 어느새 퇴사를 한다.


돌이켜보니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역배우가 하고 싶다고 엄마를 조른 적이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어버리면서 그 관심을 접었다. 또 순전히 주목받고 싶은 마음에 학생회장을 했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사춘기를 겪으면서 수줍음이 많아졌다. 나에게 이런 욕구(관종? 창작?)가 있음을 오랜 세월 잊고 살았다.


연극을 하면서 새로운 역할을 해보는 것, 다양한 글감으로 글을 쓰고 브런치에 공유하는 것. 이 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나의 결에 맞다.


나는 그간 나의 기질과 결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의 2막은, 내 타고난 결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살고 싶다.


개업을 하기 전까지 내가 못 해본 것들 해보고, 개업을 한 후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나가며 내 삶을 채워나가야지. 물론 나에게 부족한 면들도 갈고 닦으면서 살아가야겠지만, 나와 다른 결, 다른 기질의 것들을 내가 쉽게 얻지 못한다는 것을 나의 부족함으로 돌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 타고난 결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로서 살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지금이 좋다. 

지금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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