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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첫 시를 용기 내어 올려봅니다

친구의 양말 바닥 구멍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by 유랏차차

혹시 올린 배경사진이 너무 적나라했다면 죄송합니다. 나름 저에게는 역사적인 순간의 사진이니 양해해주세요.


전말은 이렇습니다.


최근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봤습니다. 주인공은 문화센터에서 시 강좌를 듣습니다. 시는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라는 말에, 주인공은 계속 주변을 관찰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인공은 '시는 찾아오는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시상을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 않고, 찾으러 다니면 오지 않는다고요. (결국 영화의 끝에 주인공은 시 한 편을 써냅니다.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시는 무엇이고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사랑합니다. 최고의 영화. 모두에게 추천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본 이후로 언젠가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크게 시를 쓰려는 노력을 한 건 아니고 자기 전에 시집을 펴서 조금씩 읽어봤습니다. 밤에 읽던 시집 덕분일까요?


저에게 처음으로 시가 찾아왔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 글 배경사진에 있는 바로 그 양말 바닥 구멍에서요. 며칠 전 연극 연습을 하다가 친구 양말 바닥에 난 큰 구멍을 발견했습니다. 양말 주인도 양말 바닥에 큰 구멍이 난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큰 구멍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달이 떴다'는 말을 했는데, 헉! 그 순간 제 머릿속이 번뜩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습실 구석으로 가서 시를 휘갈겨서 썼습니다. 지금의 시의 아주 기본적인 형태, 두 문장짜리 시를요! 제 인생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초기 버전이 나아보이기도 하고……..


그 후 요 며칠은 이 시를 윤을 내고 광을 내면서 시에 대해 틈틈이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시를 그저 그렇게 대충 넘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양말 바닥에 난 구멍과 달의 이미지를 어떻게 연결 지을까에 집중했는데, 양말 바닥 구멍을 생각하다 보니 그 구멍이 난 과정에 대해서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구멍 난 양말을 신은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또 그들의 관계와 그들의 하루에 대해서 조금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시가, 바로 아래의 시입니다. 제가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보는 눈, 정확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이 자란 것 같아 스스로 기특합니다. 아, 참고로 저 양말의 주인은 저의 연인이 아닙니다. 여하튼 새벽 감성을 핑계로 브런치에 저의 첫 시를 올려봅니다.




구멍 난 양말


오늘 밤은

반달이 떴어요


둥실

둥실

회색 먹구름을 뚫고서

뽀얀 얼굴을 드리운

달의 반


당신 양말 바닥에도

조그마한 반달이 떴네요


걸음

걸음

신새벽을 가로지르며

달빛 자국을 새기는

당신의 발


당신

당신

나의 반





P.S. 나름 윤내고 광낸 시라고 하지만 아직도 눈에 밟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브런치 글을 올린 후로 조용히 들어와서 수정에 수정을 반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제목을 짓는 게 제일 어렵네요. 혹시 이 시에 어울리는 다른 제목이 있다면, 댓글이나 연락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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