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는 학교 주변 빌라의 원룸에서 살았습니다. 말 그대로 방 한 칸입니다. 방안 모든 공간을 10 걸음 안에 갈 수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었습니다. 가끔 6개 묶음 생수를 편의점에서 살 때면 땀을 흘리며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몇 명의 친구들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오피스텔에 살았습니다. 너무 부러웠습니다. 언젠간 취업하면 나도 오피스텔에서 살아보겠다 다짐했었습니다.
몇 년 뒤 다행히 그 꿈을 이뤘습니다. 당시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현 아내)와 미리 집을 합치면서 둘이 함께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오피스텔 전셋집을 예비 신혼집으로 구했습니다. 10평 남짓이지만, 방도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작지만 행복했습니다.
오피스텔은 생각보다 불편한 점이 많다.
제가 살던 오피스텔은 한쪽 벽면이 전부 창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창문 건너편은 다른 오피스텔이었습니다. ‘어차피 블라인드를 내려두고 살 거니까, 낮에는 보통 회사에 있을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생각보다 불편하더군요. 높디높은 맞은편 건물에 가려 햇빛은 거의 안 들어왔고, 가끔 들어오는 햇볕을 쬐려고 블라인드를 올리면 맞은편 집이 뭐 하고 있는지 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햇빛의 중요성을(그리고 건폐율*의 중요성을). 겨울엔 통창에 결로가 생겼고, 잘 마르지 않아 금세 곰팡이가 가득했습니다. 관리비도 비쌌습니다. 전에 살던 원룸 빌라는 경비 아저씨가 없어서 매달 관리비로 5만 원 정도 냈습니다. 그런데 오피스텔은 한 달에 20만 원이 넘었습니다. 깨끗한 건물, 안전한 건물에는 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작더라도 오래되었더라도 아파트로 가야겠다. 기왕이면 내 집으로
* 건폐율 : 대지 면적 가운데 최대한 건출을 할 수 있는 면적을 나타내는 비율 (네이버 지식백과)
1기 신도시는 다 좋은데 아파트만 오래됐습니다.
퇴근하고 매일 저녁, 산책을 하면서 근처 동네의 아파트 단지들로 걸어갔습니다. 1기 신도시로 조성된 곳이라 아파트가 많았습니다. 대신 30년 정도 되었지요. 누가 봐도 아파트가 오래됐습니다. 요즘처럼 높이 솟은 멋진 아파트도 아니고, 큰 평수가 아니라면 복도식입니다. 또한 소형 평수 대부분은 1 Bay 구조 (1자 형태의 집)이었습니다. 대신에 장점도 있었습니다. 오래된 만큼 단지 내에 나무들도 키가 컸고, 1기 신도시인 만큼 도로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어서 웬만한 프랜차이즈가 다 들어와있는 상권, 마트, 백화점도 있고 서울 가는 교통편도 잘 되어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파트 오래된 것 빼고는 다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원룸에도 살았었는데, 이 정도면 궁전 아닌가?
아내에게 오래된 아파트를 사야 한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아내는 복도식 아파트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습니다. 우선 무섭다는 게 제일 큰 이유였습니다. 사실 저도 무서웠습니다. 아파트는 높고, 복도에서 바닥을 볼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과 고소공포증이 합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몇몇 단지는 복도에 창문이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창문이 있으면 최소한 떨어질 것 같다는 느낌은 안 들지 않을까요. 복도에 창문이 있는 단지, 그중 예산과 맞는 단지를 골라 놨습니다. 아내에게 처음엔 직접 물어봤습니다.
“여기 살면 어떨 것 같아?”
너무 오래됐다, 복도식은 창문 있어도 무섭다 등등의 불만이 나옵니다. 계속 물어봤습니다. 나중엔 그냥 싫다고 그만 이야기하랍니다. 더 이상 얘기했다가는 영영 그 아파트 근처는 못 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처가에 가기로 한 전날 밤, 내려가는 기차에서 읽어보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주요 내용입니다. (3페이지짜리 긴 편지로 중요 내용만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 내용 -
@@아파트는 이러한 장점이 있습니다.
1. 지리적 접근성이 좋다. 근처에 시청과 공원이 있고, 지하철역에 걸어서 갈 수 있다.
2. 금액 부담이 적다. 다주택자 매물이 나오고 있는 추세라 아직 다른 단지들에 비해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
3. 발전 가능성이 있다. 1기 신도시의 경우 대단지에 노후화되어 재건축 재개발이나 리모델링에 대한 이슈가 생길 수 있다.
@@아파트는 이러한 단점이 있습니다.
1. 집이 작다. 10평대 후반의 방 1개, 거실 1개짜리의 작은 집이다.
2. 복도식이다. 대신 모든 층 복도에 창문이 있어서 바람이 들이치거나 무섭지 않다.
만약에 이 아파트를 살게 된다면 내부를 깔끔하게 원하는 대로 다 고쳐줄게. 안에 이쁘게 꾸며서 행복하게 같이 살아보자.
다행히 아내는 편지를 읽어줬습니다. 그리고 몇 번 @@아파트 단지를 구경하고는 이사 간다면 내부를 전부 리모델링한다는 조건을 걸고 허락해 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