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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주 변호사 Jun 24. 2024

책 <세컨드 라이프> 리뷰

지독한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자의 세컨드 라이프

'지독한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빠져버린' 주인공이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는 소설.


책 뒷면에 적힌 요약 몇 줄만 보고 읽기로 결심했다. 무료로 책을 있는 공간에 갔다가 책장에 있는 수많은 중에서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다.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꽂힌 것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두 번째로 얻은 삶의 기회로 권태와 무기력을 물리치는 내용인가?!라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이것은 소설이니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지극히 일차원적인 나의 생각은 자기 계발서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저자 '베르나르 무라드'의 약력이 매우 흥미로운데 말 그대로 전문 금융인이다. 금융인이라고 소설을 쓰지 말란 법은 없지만,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전무까지 지내고 프랑스에서는 언론사가 있는 미디어 그룹에서도 일했고, 현직 프랑스 대통령인 마크롱의 대통령 선거캠프에서 선거자금 관련 역할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정통 작가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약력은 이 소설의 뼈대가 된다. 다 읽고 나니 작가는 자신의 경력을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알차게 잘 이용하는 영리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마저 든다.


소설은 지독한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그의 과거를, 그러나 과거라고 해봤자 불과 3개월 남짓 기간 동안 발생한 주인공이 겪은 일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소설 초반에 그의 내면 속 지독한 자기혐오를 고백하는 부분만 지나면 어느 순간 속력이 붙으면서 소설 속에 빠져들게 된다.


두 번째 기회는 무엇이고, (가장 궁금한) 대체 누가,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으로 계속 읽다 보면 그다음 단계가 궁금해지고, 또 궁금해지는, 마치 예능 방송처럼 잘 짜인 소설이다. 그렇다고 얄팍한 기교로 쓰인 소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결만 놓고 본다면 그게 말이 되냐고 반문할 것 같은 (소설 의) 결론을,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설득당하게 된다.


그래, 진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어떤 유튜브 방송에서 관련 교수가 나와서 한 말이 인상 깊었다. 대략 요약하면, 사람은 어느 국가에서 태어났는지(즉, 국적이 무엇인지)가 그 사람 인생의 약 50%를 좌우하고, 부모가 누구인지(즉,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라는지)가 남은 30%를 좌우한다는 여러 국가에 걸친 경제학, 정책학 실험 결과였다.


그런데 위 실험 결과가 사실이라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봤자 내 인생의 20%만 바뀐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노력이 너무 허망하고 눈물겨워서, 오히려 사람들한테는 잘 살아 보려는 삶의 의 사라지게 만들지 않겠냐는 취지로 사회자의 문과 관련 대화가 있었더랬다.


저 실험 결과상 수치의 정확성은 차치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꼭 경제학 실험까지 통하지 않더라도, 실험 결과는 우리가 삶의 연륜이라고 말하는 세상 이치로서 직접 체감하게 된다. 운명에서 '우연'은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가. 꼭 권력, 부(富)의 영역까지 갈 필요도 없이 타고난 외모조차 평등하지 않은 냉혹한 현실을 우리는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운명의 '우연'을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한 번 배정(?) 받지만, 만약 죽기 전에 두 번째 '우연'의 기회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 행복해질까, 과연 그게 더 나은 삶으로 가는 진정한 기회가 되는지에 대한 의문과 상상에서 출발한다. 매우 흥미로운 상상이자 그 상상의 과정과 결과물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상의 과정과 결과는 작가의 주관적인 것이므로 나의 그것과 같지 않을 수 있지만, 책장을 덮은 후에도 길게 남는 여운은 매우 강렬하다.


계속 떠오르는 주인공의 상념들, 그리고 상상되는 이미지들. 이 소설은 연출력이 좋은 감독의 손에서 영화로 탄생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서 인상 깊은 표현들을 발췌했다(아래 발췌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음).



 




"인간의 본성이란 것은..."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치밀하게 분석한다 해도,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뜻밖의 놀라움을 숨기고 있는 법이지요. 바라티에 씨. 당신과 같은 경우를 우리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군요. 그래요. 당신이 정말로 그가 될 수 있으리라 단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왜냐하면 당신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비어 있기 때문이죠."


"당신은 완전히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악하고 병든 영혼이라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당신 안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 안에서 최적의 수용체를 발견했던 것이죠."


" (중략)... 어쨌든 당신은 철저하게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예측과 통계, 그리고 모델화하려던 시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후략)"


"당신은 어떤 형태도 색깔도 특별한 취향도 없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비어 있는 존재란 말이죠. 이제 그게 증명된 셈이고요. 당신을 스스로에게 매어둘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젊은 시절에 써두었던 오래된 원고뿐이었지요. 출판조차 되지 않은 원고요. 드몽탈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것도 성공적으로요, 당신을 당신 과거, 그리고 당신의 정체성과 이어주던 마지막 끈을 잘라내 버린 셈이죠. 그로 인해 당신은 거대한 구멍과 같은, 즉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드몽탈의 영혼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침투할 수 있었던 최적의 몸뚱이가 되어버린 것이죠..."


"어쨌거나 난 이제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비록 다소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난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석 달 전에 만났던 남자의 절망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 같군요. 비어 있는 한 남자. 자신의 공허한 상태를 냉철한 이성으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던 한 남자를 말이죠. 그때 당신이 얼마나 죽고 싶었을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의 뜻을 존중해주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 시간 십육 분 뒤면 난 죽는다. 39번 버스 바퀴에 으스러져 위엄 따윈 없는 모습으로. 어둠이 내리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을 것이다. 온 도시는 푸르스름한 안갯속에 잠길 것이다.

  아마도 짧은 순간의 맹렬하고도 효과적인 충격에 고통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달리는 버스에 치인 내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라 정점에 이를 때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다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다시 차도로 떨어질 것이다. 자동차 바퀴가 내 정수리를 짓이기고 지나가면 두개골 속의 골이 쏟아져 나와 걸쭉한 회색빛 죽처럼 도로 위로 퍼져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확정된 죽음을 기다리며, 난 레콜밀리테르광장 부근의 조그만 바 카운터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고 있다.

 역류한 위액 같은 쓰디쓴 침을 삼킨다.



 그들은 말했다. "삶을 바꾸는 것"이라고. 또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중략)

 난 그들의 말을 믿었다. 그렇다. 그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들이 밝고 경쾌하기까지 한 얼굴로 한껏 미소를 띤 채 '또 다른 삶' '두 번째 기회' '새로운 출발'을 약속했을 때. 나의 온 존재로 그들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정말 나한테 다른 선택이 있기는 했을까?


 당시 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내 삶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내게는 오랫동안 복잡하게 다른 대안을 찾을 이유나 그러고 싶은 마음도, 그럴 수 있는 힘은 더더욱 없었다. 삶을 끝내고 싶은 마음은 처음에는 막연하게 퍼져가다가 점차 내 가슴을 찌르는 듯 강렬해지더니 급기야 강박적인 결심으로 굳어져버렸다.

그렇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중략)

 요컨대 그들이 얘기하는 프로젝트가 그럴듯한 전망을 제시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던 것이다. 그것이 내 자살 계획을 대체할 만한 대안이 되어준다고.



아마도 내가 부서질 듯 약했던 탓일 것이다.

부서질 듯 약하고 의기소침해서.

부서질 듯 약하고 의기소침하고 이를테면 끝장난 기분이어서.

그렇다. 당시 난 죽은 것이다 다름없었다. 그때 난 아직 마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마르크 바라티에라는 이름으로.




내 삶. 예전의 나의 삶.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마르크 바라티에의 삶은 잘 짜인 한 편의 멋진 소설 같은 삶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어떤 특징이나 별다른 개성 없이 감탄은커녕 미미한 동정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눈에 띄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다. 한마디로, 시시한 인간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의 유일한 특이점은 모든 면에서 거의 병적으로 아무런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러한 결함은 아주 느리게, 쉽게 감지되지 못한 채 지속되어 온 과정의 결과였다. 무절제한 어린 시절과 곪아터진 청소년기를 거쳐 아무런 생각 없이 '서른 고개'를 넘는 동안 난 점차 즐거움, 기쁨, 선함과 같은 긍정적인 기운을 지닌 모든 종류의 정서에 문을 닫아걸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부식되어 간 나는 이화작용과 유사한 병증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에서 동물로, 그리고 마침내 유기 폐기물의 단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짐승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자명종이 요란하게 울렸을 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회색빛 모래사장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난 생각했다. 저 자명종 소리가 밥값을 한다고. 또 생각했다. 저 소리 덕분에 내가 매일 아침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라고. 마치 전기 충격기처럼 흉곽을 들썩이게 하고 또 몇 시간을 더 살아가게 만드는 거라고.

정말이지, 끔찍한 소리다.

날카롭고.

끈질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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