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날, 정확히 그다음 날부터 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겨났다.
사람들의 얼굴을 그전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다른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 본 사람이건 익숙하게 보던 사람이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건 다소 무례하거나 상대방이 불쾌해 할 수 있는 사정이라 어디에다 이야기할 만 것이 못되었다.
살아 움직이는 저 팔딱이는 생명에서 죽음 직후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생기 있는 저 이의 얼굴이 얼음처럼 투명하게 멈춰버린 장면이.
반짝이는 저 두 눈이 떨림 없이 굳게 닫히고, 고운 솜뭉치를 입안 가득 코안 가득 물고도 미동 없는 저 얼굴이.
삶에 지쳐 시들어가는 이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생명의 기운이 몰려있는 이의 얼굴에도 여지없이 죽음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살가워서 도무지 죽음을 상상할 수 없는 이의 얼굴을 보고도 관 속에 누워 멈춰버린 육체를 그려냈다.
'나의 존재의 근원인 우리 엄마도 죽고 말았는데, 도대체 세상 그 누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예외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두렵거나 섬뜩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 대단히 철학적으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당신의 얼굴에서 죽은 후, 염을 하고 관 속에서 누워있는 당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라고, 아무리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한들 그 건 저주에 가까운 주문처럼 들릴 것이 당연하기에 애당초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홀로 죽음과 상투를 벌인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일자로 누워 있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생경해서 눈물도 이내 흐르지 않았다.
이렇게 편하게 대자로 누워서도 딸리는 호흡에 힘겨워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이 신기했다.
정말 오랜만에 깊이 잠든 모습이 편안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어서 빨리 죽어 편해지고 싶다던, 살아생전 엄마의 넋두리가 이걸 두고 한 말인가 싶어 아주 잠깐 위로가 될 뻔했다.
호흡기를 달고 있는 엄마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에서 잠깐 잠들어 있을 뿐, 여전히 살아있구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곧 입 안에 머금고 있던 피와 심폐소생술로 으스러진 가슴팍에서 죽음을 실감했다.
엄마의 빈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면 나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득이 되기도 흠이 되기도 했던 그 고운 얼굴이 더욱 선명해서 아쉽고 안타까운 향년 72세 나이에 엄마의 생이 마감되었다.
그리고 반년이 겨우 흐른 이 시점에 나에게 죽음은 당면한 과제가 되어버렸다.
죽음은 세상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란 걸,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새삼스레 깨닫는 시간이다.
죽음은 삶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나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간중간 섞여, 살아 있는 동안 불규칙적으로 존재를 드러내어 각자 식대로 소화해 내야 할 과제이다.
어쩌면 그게 인생의 다 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엄마를 가장 온전히 기억할 수 있는 일은 나의 대에서 끝날 것이 자명하니
내 기력이 다하는 동안은 오랫동안 엄마를 기억하며 살아갈 일이다.
44년을 엄마 있는 인생을 살았으니 축복이다.
앞으로 엄마 없이 살아갈 내 시간이 그 보다 더 할지, 덜 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44년간 보호받은 그 힘으로 나를 보호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보호하며 역시 살아갈 일이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