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ranaim Lee Nov 09. 2022

유수처럼 흐르는

1

코코가 삼일째 참치 내놓으라고 운다

밤낮없이 때려 박는다 울음을

통장 잔고를 보니 교통비 나가면 일주일도 못 버틸 금액인데 미안해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참치도 츄르도 간식도 없어 밥도 반찬도 아무것도 없어 우리도 없어 그러다 이제


2

서랍을 뒤진다 동전을 모으는 이유는 절실할 때 간절히 쓰이기 때문이다 현금도 내게는 비슷한 개념이다 급할 때 쓰기 위해 모아둔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 가운데 위로가 된다 보이지 않는 숫자들은 만져지지 않는다 체감되지 않는다 내 것인가 아닌가 홀씨처럼 불면 사라질 이미지에 준하지 않는다


3

그래 금! 금이 있었지 금붙이를 찾아야겠다

힘들 때 팔아서 쓰세요 누나,

지금 어디에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너에게 받은 금, 금방 쓰라고 금방 팔라고 주는 금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사람들은 금을 캐는 걸까 금을 사는 걸까 금을 파는 걸까 금을 선물하고 금을 모으고 금을 팔며 금을 긋는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사랑보다 금을


4

계약도 운이다 코 앞에서 늘 주저하는 사람들

말만 오가는 미팅 속에 남은 건 남루함이다

그래도 11월까지 버틴 게 어디냐고 다독이다가

모든 것들이 다 지겹게 느껴질 때

오르락내리락 내리락오르락

올라갈 때는 기어 올라갔는데 내려갈 땐 미끄러진다

이것이 중력의 법칙인가


5

이십 대에는 불안정함 속에서도 희망이 보였는데

삼십 대에는 불안정함 속에서 절망을 본다


6

물질의 세계에 살면서 물질에게 철벽을 치며 세속적이라는 말을 치욕적으로 여겼지 돈에 미친 사람들을 동정해가며

이게 맞아. 아니 이게 맞아?

부호만 바꿔가며 되묻길 반복할 때

순진해서 멍청하다는 말은 나를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르겠구나 돈으로 사는 인간이 돈 없이 어떻게 사니 물고기가 물 없이 어디서 살 수 있겠니 물 밖에 없으니 물 밖에 있으면 안 된다는 물음 밖에


7

남 탓은 쉬운 걸까

언제나 나는 내 탓부터 해왔는데

mea culpa

메아 쿨파


8

언제쯤 가난했던 기억을 지우고 본래의 취향대로 살 수 있을까 모아둔 러쉬 중 하나를 꺼내 물이 새는 플라스틱 욕조에 풀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아서 따뜻한 물 좋은 향기 풍성한 거품 거품 거품 인어공주의 마음은 내가 잘 알아 목소리를 잃지 않고 다리를 버린 내가 잘 알아 다리를 얻고 버블이 된다고 해도 한 번쯤은


9

밥은 먹고살자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좋은 집안에 좋은 부모를 두지 못했다 해도 밥은 먹고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강변에 살고 싶었던 꿈이 강변을 따라 흘러간다 유수처럼


10

턱관절이 너무 아파서 자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자는 습관 때문인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종종 그러니까 당장 공격하는 누군가가 없어도 무의식적 불안감에 긴장하고 잠들더라 아무리 힘을 빼려 해도 누군가를 물어뜯을 기세로 힘이 들어가더라


11

무너지는 중력은 힘이 빠지는 과정일까

힘을 뺄수록 예술은 떠오른다 부력처럼


12

엄마 집에 먹을 게 없어 아무것도 없어

새벽에 갈게 가서 반찬이라도 해줄게

무력할 땐 기댈 곳이 부모뿐이고


13

서른, 아홉 정주행 하면서 끝없이 울었다

초반에 연출도 어설프고 대본도 어설프고 연기까지 어색해서 뭔가 싶었는데 보다 보니 깊게 누르는 압점이 느껴진다 뭐든 시작하기도 어렵고 끝을 내기도 어려운 시기를 향해 저 또한 흘러가는 중입니다


14

섣부르지 말자 마음이든 생각이든


15

자꾸만 아침에 자고 밤에 눈을 뜬다

마트 대신 편의점으로 달려간다 아직

마트도 열려있는 시간인데 관성처럼

관성처럼 밤으로 달려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령을 들이, 붓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