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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phile Feb 05. 2023

[영화 칼럼] - 사랑은 비를 타고

지난한 세월에 대한 품위 있는 찬가.

Singin' in the Rain, 1952

    영화라는 영상매체는 시대적으로 정형화된 중층적 관념들을 깨부수고 나서야 진정한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비평가들은 영화를 연극의 리얼리즘에 대한 의태 정도로 인식할 뿐, ‘품위'있는 예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간단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영화가 제시할 근대적 모더니티가 무성영화의 한계로 인하여 펼쳐질 수 없었던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토브와 아이젠슈타인 같은 선구자들은 ‘필름'이라는 예술의 재료 내에서 ‘몽타주'라는 기법을 통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예술의 범주 내에서 작품 스스로 즉자적인 인력과 척력을 만들어내는 혁신적인 기술적 도약을 선보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화예술이 ‘목소리'(유성영화)를 얻게 되는 과학적 진보를 통해 유럽에서는 표현주의, 네오리얼리즘, 그리고 누벨바그를 거쳐—또한 앙드래 바쟁 같은 평론가, 그리고 셥, 구달, 엡스타인과 듈락 같은 사상가들이 영화 예술의 존재론(ontology)과 인식론(epistemology)을 더 깊이 탐구하기 시작하며—점진적으로 영화예술은 근대성(modernity)을 품은 ‘품위'있는 예술로서 명확한 독립성을 확립하게 된다. 경제성—독립성이 아닌 사회적 재질이나 사교성—의 기능은 작품성을 고려할 때 배제되어야 하지만 영화예술의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필연적으로 고려돼야 하는 자본적 요소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생소하지 않음과 동시에 영화 예술의 지난한 역사와 ‘품위'있는 예술로서의 도약을 해석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리고 그 작품이 영상언어의 예술적 정조와 산업적 경제성을 용인한 태도를 교직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런 작품은 위대한 영화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진 캘리와 스탠리 도넌의 <사랑은 비를 타고>는 이 모든 것을 1952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성취해 냈다.


    극 중에서 ‘연극’ 배우 지망생인 여주인공 캐시 샐든은, 무성영화계의 절대자인 배우 돈 록우드를 만나 영화는 바보 같은 예술이라고 비판하며 이렇게 얘기한다: “적어도 연극은 ‘품위'있는—dignified—직종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록우드의 좌우명은 “품위, 언제나 품위.”: “Dignity, always dignity”이며 이런 캐시의 발언은 록우드 스스로를 넘어 그가 상징하는 무성영화—영상예술—그 자체를 비난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영화에서 록우드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인물은 캐시가 다가 아니다. 영화는 서두에서 자체적으로 록우드가 지닌 품위의 모순점을 짚으며 반박하고 시작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록우드는 플래쉬백 몽타주를 통해 그의 평생 친구이자 음악 감독을 맡고 있는 코즈모 브라운과 함께했던 품위 있는 과거의 삶을 내레이션으로 조망한다. 하지만 화려한 내레이션과 달리 스크린은 그들이 겪었던 수치스러운 과거를 비추는데 전념할 뿐이다. 이것은 록우드와 코스모의 미성숙한 동질적 동반자 관계가 “존엄의 부재"—Absence of Dignity—하에서 확립되었음을 방증한다; 록우드가 스턴트맨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점 또한 ‘사랑은 비를 타고'가 명백히 영화사의 기술적 발전과 모더니티에 대한 러브레터임을 증명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록우드는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무성영화계의 대표 여배우 리나 라몬트와 작품을 찍어 일약 톱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리나는 록우드에게 존엄성을 선사하지만 그는 그것이 진실성을 상실한 존엄성—Dignity without veracity—임을 인지한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영화에서 케시 셀던이라는 캐릭터가 급변하는 시대로부터의 완충적인 면모를 드러내는데 중요한 의의를 제공한다. 1927년, 역사상 처음으로 영화는 목소리를 얻는 것에 성공하고 유성영화가 개봉함으로 모든 제작사들은 목소리가 이상하거나 발음이 어눌한 배우들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이에 부응해 리나는 더 이상 그녀가 음치이며 ‘품위'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여배우라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된다; 캐릭터들이 리나를 대하는 태도는 과거 비평가들이 무성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서로 조응한다. 반대로 캐시는 리나의 기질과는 정반대로 묘사된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리나의 대척점에 존재하며 ‘연극’을 상징함과 동시에, 목소리와 가창력,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까지 ‘품위'있지만 흙속에 묻힌 진주처럼 발굴되지 않은 미숙한 상태로 표현된다. 하지만 리나의 존재감이 컸던 나머지 영화사들은 캐시라는 보석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리나의 목소리로만 사용하며 그로 인해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캐시의 진실성을 연기하는 리나의 거짓된 퍼포먼스만을 관람할 뿐이다. 영화는 이런 국면을 통해 연극(캐시)의 리얼리즘을 흉내 내던 무성영화(리나)를 비판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두 주인공의 예식


    시그리드 크래크아우어는 그의 비평 “오락의 추종": Cult of Distraction”에서 영화관에 사회, 그리고 세속적 종교성을 결부하여 극장이라는 장소를 추상적 예배당에 빗대어 표현한 적이 있다. 이와 유사하게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는 극장을 예식장으로 묘사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 두 개의 극장 시퀀스는 이 개념을 외부화한다. 첫 번째 극장에서 록우드는 리나와 함께 관객(하객)들을 맞이하는데 여기서 그는 리나가 입을 여는 것을 방해하고 조화롭기를 거부하며 독립적인 자세로 스스로를 대변한다. 하지만 영화의 종장에 다다르면 앞서 말한 상황의 형국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록우드는 극장을 뛰쳐나가는 캐시를 멈춰 세우며 침묵이라는 제약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연극’—록우드와 캐시가 극장 내에서 스크린, 또는 무대도 아닌 관객석에서 노래를 부르는 시퀀스—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록우드—영화—와 캐시—연극—의 예식일 것이다; 그들이 ‘극’을 보이는 극장에서는 ‘영화’ 시사회를 진행 중이었다, 그곳은 영화와 연극이 공존하는 문맥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절묘한 지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예식을 뒤에서 지휘하는—혼을 불어넣는—인물은 다름 아닌 코스모—음악—이다. 이 예식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렇게 <사랑은 비를 타고>는 록우드와 캐시라는 캐릭터를 빚어 영화라는 영상예술이 연극이라는 목소리를 얻어 마침내 “진정성을 갖춘 존엄성"—Dignity with veracity—을 얻는 과정, 제약적 예술 매체에서 표현의 한계성을 타파한 예술로 도약하는 사건을 그 어떤 영화보다 화려하고 우아한 방식으로 표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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