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향기, 화장실 서랍 맨 위쪽 칸.
플로랄 향기와 알데하이드를 혼합한 향기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하였습니다. 메이 로즈와 쟈스민이 선사하는 플로랄 향이 시트러스 향의 탑 노트에 밝은 빛을 채워 줍니다. 알데하이드가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안 바닐라 어코드가 부드럽게 퍼져 관능적인 잔향을 선사합니다.
당신의 첫 향은 무엇이었나? 내게 첫 향수는 샤넬 넘버 파이브였다. '향수의 소유' 개념으로 하면 아니지만, '향의 소유' 개념으로 하면 어느 정도 들어 맞는다. 손이 닿지 않던 화장실 선반, 변기를 밟고 올라가면 있는 좋은 냄새가 나는 물. 그건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정제된 향, 엄마의 냄새였다.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강하고, 끝의 향은 아주 오래 남는.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니고 그저 뚜껑을 열어서 향을 킁킁거리고 내려놓는 순간이 반복되면서 내 안에는 샤넬 넘버 파이브가 쌓여 갔고, 엄마의 향기에 대한 기억도 또렷해져 갔다.
엄마는 내게 어떤 사람이던가. 내가 향기를 잘 놓지 못하고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엄마를 닮았다. 엄마는 이제 물건을 아주 잘 버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엄마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로 하여금 알고 있다. 내가 플라스틱 페트병에 쌀을 넣고 시리얼을 넣고 곡류들을 분류해 전부 부어 넣듯이, 엄마는 종이 상자만 생기면 잘라서 그 안을 물건으로 채워 넣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엄마가 준 옷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분명히 이제는 내가 입지 않는 옷이기 때문에 기부를 해도 좋을텐데 싶으면서도 언젠가 엄마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 같아서, 샤넬 넘버 파이브의 잔향을 파헤치며 입지도 않는 옷들을 끌어안고 서울을 전전한다.
그것들을 전부 끌어안고 이동하는 내가 미련하다고 해도 나는 물성으로 하여금 나의 소모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버린다는 것은 그것과의 단절이고 단절은 결국 나를 구성했던 무엇을 끊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향을 가진 어떤 물건들을 잘 버리지 않는다. 무언가 기억하는 데에 있어 향기는 늘 친절을 베푸는 존재다. 마릴린 먼로는 "난 잘 때 샤넬 넘버 파이브만 입고 자요."라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삶에 향기라는 것이 깊숙이 배어 있다는 뜻이었듯이, 나의 '개인적인' 샤넬 파이브는 '세련된 도시 여성의 향기' 보다는 추억과 그리움의 향기로 자리 잡았다. 사실 향기는 결국 기억을 위한 수단이다. '기억' 이라고 하면 뭔가 추상적이고, 아스라한 노스텔지어를 자극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어떤 첫인상을 남기고 싶을 때마다 다른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뭔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을 위해 향수를 뿌리는 것은 아닐 테니까. 물론, 혹은 늘 사용하던 향기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기도 하며, 기분에 따라 다른 향수를 뿌리는 사람도 있을 테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향기는 기억으로 구성된 인간이라는 주체를 표현하기 위한, 어떤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거나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존재를 설명하는 도구임에 분명하다.
앞서 나는 '향수가 굳이 노스텔지어를 자극해야 할 필요는 없다' 라고 말했건만 사실 나 스스로는 향수를 생각하면 향수香水와 더불어 향수鄕愁가 함께 떠오른다. 어떤 노스탤지어의 깃발을 노래한 시인처럼, 향수와 향수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내게 자리잡았다. 가장 큰 영향은, 역시 향수와 엄마에 관련된 기억 덕분이겠지만 떨어져 살면서 찾아가기 힘든 먼 고향에 6개월에 한 번, 두 번 내려가다보니, 그 사이 쉴새없이 변화하는 고향의 모습이 결국 내게는 영원히 향수로만 남은 기억을 상기시킨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 속에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림과 코끝을 스치는 향기 뿐이고 결국 모든 것은 서서히 변화해 가기 때문일까. 그 변한 곳에서 내가 그리워하던 향기를 다시금 떠올릴 수만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은 샤넬 넘버 파이브를 되짚으며 황금빛 피아노 음률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음악은 엄마가 자주 불렀던 독일과 한국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가곡들. 전부 엄마가 사랑했던 노래들. 그냥 언젠가 아무 이유 없이 와락 안겼을 때 품에서 피어오르던 노란 추억들. 내가 향수에 대해 가지게 된 모든 첫인상은 샤넬 넘버 파이브에서 비롯한다. 향수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풍성한 짙음, 그게 '나의' 샤넬 넘버 파이브다. 앞으로 이 시리즈에서는 '나의' 향수들을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나의 샤넬 넘버 파이브에 대한 기억이, 그 서문을 여는 데 충분한 설명을 여러분에게 제공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