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대학교 과제 레포트, 여성과 포스트 휴머니즘
미래를 논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논해야 하고 현실을 논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인간’에 누구를 포함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 여자, 아이. 노인?” 까지 대답할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동물, 혹은 인간과는 다른 종’의 생명체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달랐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기본적인 인간의 형태는 남성이었고 여성은 ‘자궁 소지자’로 남성보다 열성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히스테리라는 말의 어원을 고려해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근대부터 여성의 영혼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어졌고, 여성에게도 이성이 존재함을 묵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것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여성의 역사를 전면 부정하다가 겨우 목도하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존재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자 했으며, 강력한 반발이 이루어졌지만 ‘여성적인 것’은 열등하다는 시각이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대에서는 여성과 남성에게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다고 여기기도 하고,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역차별 시대’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떤 사회에서 공포로 생각하는 존재와 재생산되는 괴담의 형식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서는 처녀귀신이 두려운 존재로 각인하고 있으며, 낙태한 여성에게 죄책감을 부과하기 위한 낙태령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괴담 게시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꽃뱀’은 인터넷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데다 그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허위의 이야기들은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안줏거리로 소비된다. 남성의 지위를 보고 결혼하는 여성들에 대한 혐오와 무위의 공포가 존재하며, 기혼 여성들, 특히 아이를 낳은 여성들은 충蟲이 된다. 다른 존재, 울타리 바깥의 타자들은 간단하게 대상화되고 공포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면서 울타리 내부에 있는 ‘보편적 주체’와는 ‘다른 존재’로, 공격해야 하거나 동정해야 할 대상으로서 타자화 된다. 왜곡된 형식의 타자화는 보편적 주체들의 단합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집단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남성 사회에서만 재생산되는 공포가 아닌, 여성, 페미니스트 내부에서도 언제나 논쟁거리가 된다. 특히 트위터의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리버럴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 이슈나 돌봄 노동에 관해 매년 논쟁한다. 학문적 경향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페미니스트 퀴어 이론의 경우 꾸준하게 변화하는 정체성과 범주의 허위성을 고발하지만 이것이 페미니스트 사상과는 관련이 없거나, 페미니스트 진영 내에서도 불화의 시발점이 된다는 비판이 존재하고, 모성 윤리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백인 여성이기 때문에 그에 공감하지 못하는 비백인 여성들이 많다는 비판들이 적합한 예시로 기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은 당사자의 목소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사회에서 ‘보편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함을 인지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어느 상황에서는 기득권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에서 자신이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사람 간에 차이가 있음을, 이상함이 있음을, 모든 것이 본질적이고 일정하고 규정적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늘 이상함queer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여성으로서, 혹은 퀴어로서, 이민자로서, 유색인종으로서, 장애인으로서 복합적인 존재로서의 특징이 주체 내에서 교차하며 흐르고 있다. 예를 들기 위해 스팅의 노래 가사 한 부분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English man in New York>의 가사이다.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sting <English man in New York>
가사는 1967년까지 동성애가 금지였던 영국에서 커밍아웃 후 말년에 뉴욕으로 이주한 쿠엔틴 크리스프Quentin Crisp 와의 대화 이후 스팅이 감명을 받은 것이 드러난다. 존재하고 있는 공간에서 자신의 타자성을 주장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여기에서 ‘legal aline’이라는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어떤 타자성, 특히 이 글에서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합법적인 시민인 동시에 자신을 외계의 존재처럼 느끼게 한다. 시대, 역사, 공간, 심지어 철학에서까지 배제되는 존재들이 있었다. 아니,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은 유령처럼, ‘합법적인’외계인처럼 이 지구를 배회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이런 주체들을 모두 포용하는 ‘유목적 포스트휴먼 주체성’을 언급했다. 사람은 모두 다양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A는 곧 B라는 단순화보다는 타자들과 공존하고자 하는 복합성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주 골자이다. 기존의 페미니즘에는 늘 어쩔 수 없이 배제되는 존재가 있었다면,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에서는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타자이기 때문에 각자의 주체성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무의식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으로 겪을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 결국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지 브라이도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주체’라는 점이다. 그저 다른 하나의 자아일 뿐, 생각하고 규정하고 스스로를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요건을 충족시킨다. 즉 가장 여성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성별을 뛰어넘어서, 어떤 인종과 인간의 권력관계를 모두 뛰어넘어 상황과 존재의 경험이 만들어낸 차이를 인정하면 결국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본질은 없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서 현대에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이 발판을 토대로 인간의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브라이도티의 이론을 통해 사람이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근처에 있는 존재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것이 인간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현상과 사태에 있어서 최대한 공정과 중립을 지킬 수가 없겠다고 멋대로 판단했다.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마치 1인용 플레이 게임처럼, 타인은 NPC인 것처럼 말이다. 다르기 때문에, 영원히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었다. 인간에게는 어쩌면 희망이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런 상황에서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 페미니즘에 대한 개념은 ‘우리는 모두 다르다.’라는 모호한 개념 속에서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 페미니즘에서 정의하는 인간의 자아는 다른 존재들을 향해 확장하고, 가까이 있으려고 하며, 서로 다른 성질의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적이고 횡단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모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제각기의 존재들이어도 서로에게 확장하고자 하는 성질로 인해서 잠깐 맞닿은 것을 영구한 이해로 여기는 것 아닐까. 덕분에 어떤 공란에 약간의 문장을 쓸 수 있는 기회만 생긴다면 '자기 방식대로' 그를 이해하려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우리는 사람을 해석하고, 정의하고, 결국 ‘자기 자신’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을 테지만 만약 우리의 파장이 조금만 비슷한 곳에 있었더라면 분명히 터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애달픈 공백이 서로를 사랑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필체로 써내려 간 그 칸은 온전히 '나만의 당신' 이 된다. 그리고 우린 그 타자를 사랑한다. 어떻게 보면 우린 우리 자신 그 자체만으로 이해 받기는 영원히 틀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냉정한 세상에서 미시적으로나마 서로에 대한 객관을 포기하게 된다면 이윽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나아감을 통해 타자와 주체의 경계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굳이 연인 관계일 필요는 없으며 - 객관을 전부 다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나, 상대에 대한 이해 같은 것들은 일상의 아주 사소한 배려도 포함한다. 옅은 파장부터 짙은 파장까지 그 스펙트럼만 다를 뿐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서 벗어나 완벽하기 비인간인 존재들까지도 ‘인간적인’ 교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떠한 객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인간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탈-휴머니즘의 영역에서 합치하지 않는 인식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인간 종種이기 때문에 탈휴머니즘을 지향하더라도 결국 인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이 인간에 묶여있는 한, 즉 기계나 동물 같은 다른 종이 ‘되지’ 못하는 한 아마 우리는 인간중심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매여 있으면서 끊임없이 탈-인간을 꿈꾸는 것, 우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스펙트럼을 통해 모든 종속에서 탈피하기 위한 시작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제인 오스틴과 샬롯 브론테의 글을 언급하며, 특히 <제인 에어>에서 작가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태에 의해 차별받는 현실을 완전히 잊지 못해 소설의 몇 부분들이 부자연스럽게 읽힌다고 지적한 적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상황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 인간은 영원히 인간 그 자체,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차이’를 인식하고 그것에 항거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공통점’을 알게 된다면, 그저 존재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동일하게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여성의 문제는 곧 인간의 문제가 되고, 인간 주체의 문제는 곧 비인간 주체의 문제로 확장되면서 포스트휴먼 시대의 존재들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미래에는 로지 브라이도티와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가 결국 비인간으로 여겨진 여성이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에서 나아가 모든 비인간이 주체로서 공존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될 것이다.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는 자궁을 여성의 육체와 정신에 이롭거나 해로운 작용을 하는 다른 물체로 여겼으며, <히포크라테스 전집>에서 히스테리는 '자궁에 의해 야기되는 질식'이라 지칭된다.
** 앞서 언급한 여성에 대한 사유들, 현대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타자화의 문제들. 개인적인 문제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타자화’의 피해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