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 자주 올라오는 <실존 인물에 대한 극>이 싫은 이유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자크 데리다의 말을 빌려오자면 나는 여기 없는 존재다. 나는 과거의 흔적, 그리고 미래와 관계지어진 것이며 그 안에서도 나는 계속 분리된다. 요는 나는 여러 마리로 이루어진 정어리떼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면이 과대 대표된다면 그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어릴 때 '무지개 물고기'라는 주인공이 나오는 동화책을 본 적이 있다. 무지개 물고기에게 있는 은빛 비늘은 너무 아름다웠고 무지개 물고기는 그 아름다운 비늘을 나누어주기 싫어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어 딱 하나만 옆구리에 가진 채 바다를 유영한다. 나에게도 그런 은빛 비늘이 있고, 동시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비늘이 있다. 무지개 물고기의 '비늘'은 곧 무지개 물고기를 이루는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비늘이 있는 동시에 가장 혐오스러운 비늘이 하나의 물고기에게 동시에 공존하는 것. 그것은 결국 사람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나는 그 비늘을 평상시에 아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건 그냥 있는 것이다. 삶을 살면서 언제나 상승세를 탈 수는 없듯이 나도 지독하게 우울하고 슬플 때가 있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서 어이없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굴 때가 있고, 누군가가 너무 미울 때도 있었다. 바보같은 실수를 할 때도 있었고, 나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짓을 저질러 종종 자기 전 생각나면 이불을 걷어차기도 한다. 그것은 인류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느껴보는 생의 굴곡일 것이다.
문제가 있다 하면 대학로의 많은 작품들이 게을러진다는 것이다. 내 은색 비늘을 극대화 시켜서, 상처가 났던 비늘을 크게 확대시켜서 마치 내가 오로지 그런 비늘로만 구성된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 남들이 울고 웃게 만든다. 그것이 과연 윤리적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떠나 우선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 과연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것이다.
연극/뮤지컬 작품은 기본적으로 창조인 동시에 어떤 시뮬라르크, 즉 모방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모방하면서, 동시에 '지금 당장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보여준다. 그 모방이 의미가 없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찾으면서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 모방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플라톤의 연장선이므로. 그러나 시뮬라르크에 또 다른 시뮬라르크를 입히는 순간 작품은 형편없어지고 만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연극 작품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이념을 완전히 상실하고 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서사의 예술이다. 그런데 실존 인물의 서사를 현실에 존재하는 것에서 오로지 재현하기만 하는 순간,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목적성을 상실하게 된다. 의도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거한 부조리 극이 아니고서야 실존인물의 삶을 목적성 없이 재현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지 그 삶이 누군가가 공감하고 슬피 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적성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미술에서는 이미 단순 재현의 시대 대신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주요한 작품 제작의 원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굳이 '실존 인물'로 작성하지 않아도 기능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존 인물'로 써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어떤 의미있는'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고뇌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지라도 조명된 적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올라온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작가의 의도와 창작의 목적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취향이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대학로의 작품들이 그것을 견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한 가지 가설을 통해 제시해보려고 한다. 여기 목적성을 상실했다는 비난을 들은 한 작가가 서사의 특정 부분을 과대대표 하고, 혹은 축소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 작가는 재현의 재현에서 벗어나, 연극 이념을 충실하게 이행한 사람인가? 그 역시도 비판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가장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역에 해당한다. 특히 대학로에서 자주 보이는, 거대한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소수자성'을 지닌 사람들을 트로피처럼 내걸며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가장 '별로인' 부분에 속한다. 오스카 와일드, 빈센트 반 고흐, 그 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가들을 대상화하면서 그들의 인생을 더 자극적으로,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펜끝을 벼린다. 창작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유명인의 인생을 '팔릴 만한 점'을 골라잡아 만든 것이 제작에 있어 과연 신중한 고려와 끝없는 노고가 들어갔는지 의문을 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동대문에서 옷을 가지고 와서 아무렇게나 이어 붙인 다음 내가 '창작' 한 옷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다시 돌아와서, 앞서 언급한 데리다의 말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어떤 관계성으로 유지되는 존재다. 관계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과거의 나 자신과 내일의 가능성이 현재의 나라는 존재 위를 가로지르며 나는 여러 장소에서 분리되고 해체된다. 그 해체성은 곧 나라는 의식을 가진 존재가 주체성을 가지고 타인, 타자, 시공간과 관계를 맺으며 형성되는 것이지 타인에 의해 해부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 짧고 거친 글에서 작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윤리성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내면의 '길티함' 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다만 대학로의 작가들에게, 그것이 '작품'으로서 기능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성' 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실존인물에 대입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타인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다. 우리는 타자화가 너무 익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쉬운 길로만 돌아갈 작정이었다면, 애시당초 무언가를 제작하는 것을 업으로 두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예술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게 내가 실존 인물의 삶을 가지고 만든 키메라같은 작품을 싫어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