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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Dec 27. 2021

차머스와 물리주의자에게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은?

덕성여자대학교 <마음의 철학> 2차 과제물 수정 버전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만든 창조물이 길을 걷고 있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아야!”라고 말했고 창조물도 똑같이 “아야!”라고 말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진짜 아프지 않았냐?”라고 묻자, 창조물은 “세포 80개 정도가 손상되었고 강도는 10중의 3 정도밖에 안 돼.” 라고 대답했다. 창조물은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물리주의자들의 의식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자. 물리주의자들은 의식을 신비한, 혹은 물질에서 벗어난 영역으로 분리하기보다는 그것이 물질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스마트가 고통이라는 감각을 뇌의 특정 부분이 반응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했던 것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스마트의 주장은 고통을 느낀다는 느낌을 설명할 수는 없다. 즉 두뇌 과정과 감각이 동일하다는 주장 아래서 그것이 연결되는 이유와 그 둘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설명할 수 없다.


 

이에 차머스는 의식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물리주의자들이 설명 가능한, 기능적이고 심리적인 의식의 부분을 ‘쉬운 문제’로, 그리고 해명이 불가능한 느낌 그 자체인 현상적 의식을 ‘어려운 문제’로 규정하였다. ‘쉬운 문제’는 간단하게 위가 텅 비어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밥을 먹어야 한다’라는 욕구가 생기는 것처럼 신체 일부 기능이 뇌로 감지되어 어떤 행위를 촉발하는 등을 예로 든다. 그러나‘어려운 문제’는 해명이 불가능하고,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위가 텅 비었고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밥을 먹어야겠다는 행위는 촉발하지만, ‘배가 고프다’라는 느낌을 느끼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 위가 텅 비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느끼는 것을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대체 왜 우리의 뇌가 이런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영혼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 있을까? 이렇듯 의식의 문제에는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설명적 간극’이 존재하며, 차머스는 설명적 간극에 의해 의식의 신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앞서 언급한 예시를 이에 적용해보자.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창조물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아프다는 느낌을 가지지만, 창조물은 고통의 지표를 알 수 있을 뿐  ‘아프다’라는 느낌 자체를 알 수는 없다.


 

차머스는‘좀비 논증’을 통해 이를 반박한다. 좀비 논증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물리주의의 모순을 확인해보자. 물리주의에 따르면 두뇌 과정과 감각은 같다. 암스트롱은 고통이 조직 손상의 알림 기능과 같다는 대응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는데, 조직이 손상되었다는 것을 감지하는 두뇌 과정은 존재하면서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고통이 신경과 언제나 연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 된다. 또 차머스는 우리가 이미 그런 결여된 존재,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과 같은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 예시가 바로 철학적 좀비이다.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데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좀비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물리주의는 감각과 두뇌과정은 모든 형이상학적 가능 세계에서 동일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좀비의 상상 가능성, 즉 우리가 좀비와 같은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좀비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좀비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면, 고통이 언제나 신경과 동일하다는 물리주의를 부인하게 된다. 즉 차머스에게 창조물과 같은 좀비의 상상 가능성은 곧 물리주의의 감각과 두뇌 과정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리주의자들이 차머스의 좀비 논증에 대응한 두 가지 반응은 ‘선험적 물리주의’와 ‘후험적 물리주의’였다. 먼저 아예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선험적 물리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창조주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조직 손상을 알리는 센서만 있으면 고통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라 기대하고 창조물을 만들었다. 그에게 고통은 세포 손상을 지시하는 표지이다. 그런데 이 기능이 동일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통의 개념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험적 물리주의는 세포가 손상되었다는 표지는 있지만, 고통이라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는 개념적으로 모순된다고 보고, 이는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후험적 물리주의자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좀비의 상상 가능성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형이상학적 가능성은 부정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마법을 쓸 수 있고 날개가 달린 작은 요정의 허구적인 상상의 친구가 있었지만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 그 예다. 이들에 따르면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존재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하늘을 나는 말, 유니콘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유니콘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 세계의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 두 가지와 모순을 이루지 않고 존재 가능한지에 대한 가능성은 우리의 상상과 독립적이다. 소설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창조물이 감각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가 그런 존재를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은 맞다. 하지만 고통이 특정 두뇌 과정과 동일하다면 둘의 분리가 실제로 가능하다고는 볼 수 없고, 좀비에 대한 상상은 실재하는 것과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의식과 두뇌 과정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결국 의식의 신비를 해소할 과학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요약하자면 차머스는 의식의 신비를 통해 물리주의의 설명적 간극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차머스는 물리주의를 좀비에 대한 논증으로 반박한다. 좀비는 두뇌과정은 있지만 감각질은 결여되어 있는 존재인데, 이런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은 고통이 기능적으로 조직 손상의 알림이라고 보는 물리주의의 주장에 어긋난다. 조직 손상의 알림은 있는데 고통이라는 느낌을 모른다는 것은 물리주의자의 논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물론 차머스의 좀비 논증이 아예 개념상 모순이므로 상상 불가능하다고 규정하는 선험적 물리주의와, 상상 가능성은 있어도 현실에서 존재할 수는 없다고 보는 후험적 물리주의 같은 대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머스의 좀비 논증은 의식의 이원론적 문제를 다시 중요한 것으로 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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