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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Dec 28. 2021

차이에서 피어나는 것 : 몸 하나, 본질 둘

덕성여자대학교 포스트모더니즘 최종 과제 _ 들뢰즈

  

우리는 서로에게 타자다. 즉 내가 어떤 식으로 느끼고 어떤 식으로 행복해지는지 각자의 주관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에 나와 당신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단어로 행복하다, 사랑한다, 즐겁다 등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러한 예시로 전통적인 존재론에 속하는 다의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문장 속 ‘존재한다’ 는 단어 자체는 같지만 그 뜻은 다르다. 들뢰즈는 이러한 다의성을 비판하고 나서는데, 예를 들자면 같은 고양이 종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코숏 고양이와 스코티쉬 폴드 고양이는 다른데 그냥 ‘고양이’로만 구분 지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기존의 다의적 존재론을 통해서는 속된 말로 ‘퉁’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는 일의적 존재론을 주장하는데, 앞서 설명한 다의성에 단순히 대조되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러 가지 요소들과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은 것이 본질이고, ‘유일’한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볼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앙리 뒤프레는 친구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살리기 위해 대신 처형당하고, 그의 목을 가지고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때 창조물은 앙리 뒤프레가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속성들, 그가 의사로서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공부했던 책들, 그리고 빅터 프랑켄슈타인과의 관계들은 전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상태이다. 이런 경우 그는 그를 이루고 있던 관계가 완전히 ‘리셋’ 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창조물은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어떻게 구성된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창조물’을 구성하고 있는 몸, 머리, 피와 살 등은 전부 앙리 뒤프레와 같다고 가정해보자.(실제 뮤지컬에서는 여러 시체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가정의 편의상 이렇게 설정해두도록 하자.) 들뢰즈는 우리의 존재는 현실태, 강도, 잠재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창조물’의 사례에 하나씩 빗대어 설명해보자. 먼저 최초의 현실태는 ‘앙리 뒤프레’ 였을 것이다. 그가 커 오면서 정립한 가치관이나 신체의 형태, 근육의 구성 방식, 사람들과 맺은 관계 등을 총합하면 앙리 뒤프레가 되지만, 동시에 매우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당장 그가 이름을 개명한다면 더 이상 앙리 뒤프레가 아니게 되니까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 이름을 버리고 당신을 가지겠어요. 난 이제 로미오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로미오의 대사는 나름 직관적으로 들뢰즈 철학에 근접한 셈이다. 들뢰즈는 현실태를 구성하는 에너지원이자 구조를 강도라는 개념으로 명명했다. 그런데 앙리 뒤프레가 죽었고, 창조물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창조되었다. 이는 앙리 뒤프레의 질료를 가지고 있지만, 의식이나 기억은 전혀 없다. 오히려 기억이 없는 자신에게 앙리 뒤프레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감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렇게 ‘기억을 상실했지만 몸은 앙리 뒤프레이긴 한 사람’ 현실태의 일부는 가지고 있지만, 그 강도 – 앙리 뒤프레라는 본질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이 존재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인식론이나 심리 철학에서나 할 법한 동일성에 대한 문제로 보이지만 들뢰즈 철학에서도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봄직 하다. 바로 ‘앙리 뒤프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보면 되는 것 아니겠나. 강도는 존재하지 않지만, 질서는 본유하고 있는 그림자 같은 이 존재를 들뢰즈는 잠재태라고 명명한다.  



 내가 호기심을 가진 부분은 이 영역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해소되지 않았던 문제이나,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해석한 바를 덧붙여 작성해 본다. 강도가 인위적으로 결여된 상황에서 현실태의 재료가 되는 잠재태만 남아 있다. 이것은 분명 어떠한 ‘가능성’을 가진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떴을 때 내가 누구인지 잠시 헷갈리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너는 캐나다에 거주 중인 서른 살의 미국인이고 이름은 케이티다” 라고 말해주었고 내가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할 때, ‘윤정현’ 이라는 존재 대신 ‘케이티’라는 존재가 될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윤정현’ 이라는 존재가 실존인가, 아니면 ‘케이티’라는 존재가 실존인가? 이 때 시뮬라르크(케이티)가 질적으로 낮다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시뮬라르크가 현실이 된 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기심이 생긴 이유는 아마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나는 앙리 뒤프레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창조물과 끊임없이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다가도, 결국 친구의 목소리와 얼굴로 “빅터.” 라고 부르자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사과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내게는 리좀 구조나 개인의 동일성 문제가 다각적으로 얽힌 복합적인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은 어떤 현상이나 사회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이나 문화가 어떤 시뮬라르크를 제시했을 때도 그것은 포함되지 않을까? 언젠가 그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같은 일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것을 모티프로 삼은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당장 우리 눈앞에 실현될 일은 없겠지만,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었을 때 그를 어떤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를 들뢰즈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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