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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Mar 26. 2024

2강 - 동맹시 전쟁과 내전에 빠져드는 공화국

한 세기간 이어지는 내전의 시작

로마는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덕에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약 6년간 로마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문제는 로마 내부에서도 터져나왔다.

로마는 내부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끔찍할 정도의 빈부격차, 군단병들에게 약속한 봉급과 토지지급 문제, 가장 중요한 원로원 내부에 파고든 평민파와 기존 기득권층이었던 벌족파 간 정치적 안력다툼 등 아직 손도 못 댄 문제들이 산재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문제들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군복무 문제로 불거진 문제 중 하나인 시민권 분배 문제였다. 이탈리아에 있었던 로마 동맹 도시들은 로마와 동고동락하며 군단병들을 파견하고 로마의 법적 통제를 받아들인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만큼의 참정권이 거의 보장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로마인 중심의 시민권 문제가 내전으로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2.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정치적 무능함

한편 로마의 내부위기를 내전으로까지 끌고 간 가장 근본적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마리우스 본인이었다. 사실 그가 뭔가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마리우스는 명백히 여포급의 맹장이었지만 정치감각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빈약했다.

그는 집정관으로 6년이나 연임하는 동안 자신 스스로 원로원의 운영이나 정치력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귀찮아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 그는 싸우는 법만 알았지 원로원 중심으로 구성되는 당시 로마 정치를 이해해서 이끌어갈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마리우스는 세 번째 집정관 선거부터 인기를 잃기 시작해 집정관이 되기 어려울 수 있었다. 이민족이 이미 분쇄되어 더 이상 침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투르니누스(십상시)라는 선거전의 달인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임할 수 있었다.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가 지나치게 집정관 직에 연연하는 모습을 감추고 오히려 국가의 안위와 전쟁에서의 승리만을 바라는 모습을 강조하면서 선거의 승리를 도왔다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권력과 정치력 관리를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이하 사투르니누스)라는 사람에게 사실상 일임한 채 뒷짐지고 군림하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마리우스라는 엄청난 뒷배를 믿은 사투르니누스의 전횡과 급진적인 친평민파적 개혁을 막지 못했고, 결국 원로원이 필살기인 “원로원 최종 권고”를 통해 평민파를 몰아내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면 과연 사투르니누스의 무엇이 문제였을까?


3.     사투르니누스의 전횡

1)     사투르니누스의 정책과 입법

사투르니누스의 정책과 입법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좀 더”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골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라쿠스 형제가 초안한 “곡물법”을 좀 더 발전시키길 원했다. 다시 말해 정부가 빈민들을 위해 좀 더 저렴한 값에 곡물을 제공하는 법을 입안한다. 이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이미 입안했던 것이고, 딱히 원로원에서 반발을 사던 개혁도 아니었다. 또한 토지분배 법안도 입안하는데, 여러 속주 피정복 식민지들과 동맹시들의 토지를 마리우스의 군단병들에게 분배해주는 법안이었다. 이는 동맹시들의 이권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대단히 논란이 되었지만 사투르니누스의 악명을 유발한 원인은 아니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 광복 직후 정치 깡패들 저리가라 할 정도의 정치폭력을 휘두르며 자신이 원하는 법을 무엇이든 무단으로 통과시켜버린다.


2)     원로원의 권위와 전통 무시

사투르니누스는 호민관이었으며, 마리우스의 권위를 믿고 무슨 법안이든 방자하게 통과시킨다. 가령 아프리카에서 복무한 마리우스의 군단병들 각각에게 66에이커의 토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그것에 거부권을 행사한 동료 호민관들은 사투르니누스가 민회에 심어둔 정치깡패들이 던진 돌팔매를 맞고 거부권을 철회해야 했다.

그것 말고 그는 순수하게 정적들을 괴롭히고자 하는 목적밖에 없는 법안들도 여럿 입안한다. 그는 기원전 105년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게르만족에게 대패한 카이피오와 말리우스에게 반역죄를 씌워 찍어누르고 싶었다. (아무리 찾아도 구체적인 동기를 알기 어려우니, 아마 사투르니누스는 이 둘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합법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한 끝에 패배한 것에 불과했기에 당시 대역법”preduellio”이 적용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로마인들의 명예 혹은 존엄을 더럽히고 훼손하고 손상하는 행위를 형사 범죄로 규정하는 법”을 입법한다. 다시 말해 카이피오와 말리우스는 너무나도 처참하게 패배했기 때문에 국가의 존엄을 떨어트려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정복지의 신전을 약탈한 뒤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혐의를 써 고발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혐의들은 억울한 것이었기에, 당시 10명의 호민관들 중 2명이 민회에서 재판받을 때 재판상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그들 중 한명은 유력한 명문 귀족가문이자 프린켑스 세나투스였던 아이밀리우스 크라우루스였다고 하는데, 그 역시 감히 사투르니누스의 앞길을 가로막은 탓에 돌팔매를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선을 넘은” 것은 갈리아, 그리스, 마케도니아, 시칠리아 등 속주 식민지에 마리우스의 군단병들을 위한 토지를 마련해주는 법안을 밀어붙인 것과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폰투스(아나톨리아 반도의 북동쪽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정벌할 군단병들을 이끌 임페리움을 둘러싼 입법이었다.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안은 사실 마리우스만을 위한 것이었다. 마리우스가 임페리움을 얻는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권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페리움을 둘러싼 갈등과 정통성 문제, 통치권 문제는 이후 로마사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사투르니누스는 이러한 엄청나게 중요한 법안들을 통과시킬 때에도 정치폭력을 동원한다. 원로원 내부와 민회에서는 어떻게든 이러한 법안들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자 했지만, 이미 사투르니누스는 이러한 거부권들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아무리 합법적 원로들과 민회의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투표를 계속 진행시키라”는 말 한마디로 불법으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법안에 반대한다면 의원 자격 상실, 국외 추방, 20 달란트의 벌금형에 처하겠노라 대놓고 협박하며 법안에 찬성할 것을 서약하도록 강요한다. 20 달란트는 약 60억원이다.

여기에는 야사가 하나 있다. 당시 고대 로마의 원로원은 아침에 개회를 할 때마다 조점관들이 점을 치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게 조점관들이 새를 가지고 요상한 점을 친 결과 징조가 좋지 못하다는 판정을 내린다면, 그 날의 원로원은 절대로 개회를 할 수 없었다. 보통 이후에 카이사르 때도 자주 등장하는 불길한 징조들은 천둥이 친다거나 우박이 내린다던가 하는 식이다. 특히 천둥은 주피터의 분노라고 생각해 원로원을 개회해서는 안된다는 관습법이 있었다. 여기서 우연히 사투르니누스가 위 법안을 강행해서 통과시키는 날의 원로원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다. 아침 개회 전에 천둥이 친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투표를 계속 진행시키라”는 발언이 앞서 말한 조점관의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 다음에 벌어진 일이다. 다시 말해 이 날 원로원은 조점관이 불길하다고 판정했다면 폐회해야만 했다.

마리우스는 뭔가 미신 관련한 일화가 많은데, 그가 독수리를 좋아하게 된 야사도 있다. 그는 군제개혁에서 독수리 아퀼라를 로마 군단병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그가 전투에서 승리를 할 때마다 꼭 두 마리의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노래를 부르고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단병들은 독수리가 나타날 때마다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사투르니누스가 명언을 날린다. “천둥이 우박으로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면 입 닥치고 앉아있으라!”. 이는 자신의 입법을 막는다면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돌팔매를 날려버리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3.     마리우스의 무능함

강의 첫 시간에 로마 공화국과 제국을 관통해서 가장 중요한 정통성의 원천이자 근본은 원로원의 전통과 관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묘하지만 원로원의 마음을 잃어버린 정치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처참하게 비명횡사하게 된다. 사투르니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사투르니누스에게 문제가 된 것은 마리우스의 처참할 정도의 무능함이었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이었기에 당시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리 그래도 원로들의 심기를 그렇게까지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위 법안에 대한 충성서약 “협박”에 대해서 어이가 없는 답변을 해버리고 만다.


“어,,,음,,, 그 법이 ‘합법한 한에서’ 찬성할게요 ㅎㅎㅎ…!”


앞서 말했다시피 위 법안은 직간접적으로 마리우스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투르니누스가 이렇게까지 판을 다 깔아놓은 마당에 법안의 직접 수혜자인 마리우스가 위 법에 대해 저런 반응을 보여버렸으니, 사투르니누스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마리우스가 위 발언을 내뱉자 원로원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발언은 사투르니누스를 필두로 한 모든 평민파들의 지지를 잃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원로원은 마리우스 시절에 자행된 정치폭력들을 잊을 마음도 없었다. 그대로 마리우스는 정치생명이 끝나고 만다. 그가 집정관을 6번 연속으로 지낸 이후였다. 그리고 마리우스는 이렇게 자신의 정치생명이 박살나자, 그제서야 “하,,, 그 법안에 찬성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사실 그것 말고도 마리우스의 정치생명을 짧게 만든데는 마리우스 개인의 정치적 자질의 심각한 결여가 중요했다. 그는 대놓고 “내가 집정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멍청한 귀족과 부자들을 이긴 대가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다니거나, 노예에게도 무장을 쥐어주며 군단병에 복무하도록 독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자는 당시 로마인들의 인식에서는 대단히 위험천만하고 관습에도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원로원에서 지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요상한 미신도 자주 믿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마르타라고 하는 여성 점쟁이를 항상 끼고 다녔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르타라 시리아 여인인데 어떻게 로마로 왔는지 불명확하지만 점 하나는 기가막히게 정확했다고 한다. 그녀는 마리우스의 딸과 아내가 검투사들의 경기를 보러 갈 때 승부를 모두 정확하게 예언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점점 선을 넘어서, 대놓고 원로원에 출석해서 마르타를 소개하고는 “이 여자가 점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봅니다! 이 여자한테 로마의 운명을 점쳐보게 해봅시다!”라고 말하는 탓에 비난을 받아야 했다. 또한 그녀가 요구하는 제단과 제사도구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언제나 그녀를 가마에 대동하고 다녔기 때문에 군단병들은 마리우스가 진심으로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적군을 기만하기 위해 저러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마리우스는 어딘지 괴짜 같은 구석이 다분한 무인이었던 것 같고, 이러한 사람이 수많은 유능한 후보들을 계속해서 누르고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해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는 선거 참모가 필수적이었을 것 같긴 하다.


4.     합법적 시민권 확대의 좌절

하지만 이탈리아 동맹시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권 확대 목소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투르니누스과 그라쿠스 형제가 수행한 긍정적인 정치개혁 중 하나는 로마 시와 정치적, 군사적 운명을 함께한 이탈리아 동맹시 자유시민들에게도 참정권과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거의 30년을 걸쳐 제기되어온 것이다.

어떻게든 사투르니누스도 실각을 했으니 그들의 공백을 채워 이탈리아 동맹시들을 위한 참정권 부여를 지지해줄 사람이 나타나야 했다. 그 과정에서 공화국 마지막 희망의 씨앗이었던 리비우스 드루수스(역시 이름이 둘이다)라는 정치인이 살해당한다. 모순적이게도 리비우스 드루스수는 그라쿠스 형제가 몰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리비우스 드루스수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는 동맹시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다음 넷으로 정리해서 제안한다.


1)     원로원 의석을 2배로 늘려 600명으로 만든다.

2)     이탈리아 동맹시 자유시민들에게도 피선거권을 부여한다.

3)     켄투리아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 부여한다.

4)     공유지를 분배받을 수 있는 군단병들의 대상으로 확대한다.

5)     속주 총독의 부당 취득 재산 반환청구 법정의 배심원이 될 수 있는 권한 부여한다.


하이켈하임 교수에 따르면 “이탈리아 동맹들은 로마의 전장에서 싸운 병사들의 절반 이상을 보냈으면서도 로마의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로마의 정책결정에 반대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로마 시민들이 공유지 분배 때 누리던 혜택을 받지 못했고, 로마 장군들과 장교들의 학대와 횡포에 항거하지 못했고, 로마인 재판관들이 주재하는 소송들에서 항소권이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발을 샀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듯하다. 하이켈하임 교수의 책만 봐서는 당시 원로들도 이러한 법안에 대해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지지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새로 당선된 집정관 루시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 같다(역대 로마 집정관, 법무관들의 리스트는 이미 다 정리되어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Roman_consuls). 아무래도 평민파의 전횡이 채 가시지 않은 채였기 때문에 그들을 억누르고 정치를 원상 회복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법안에 결정적으로 반대를 한 게 아닌가 한다.

아무튼 드루수스는 자신의 법안이 표결되기 전에 자기 집 입구 근처에서 자객에 의해 칼에 찔린 채 숨졌다고 한다. 사실 정치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는 크고 작은 의미가 있다. 우선 공화국에서 원로원 의원과 호민관이 이렇게 자주 폭행을 당하고 암살당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집권 이후부터 로마 정치에서 정치깡패들, 암살자들이 실력을 행사하는 케이스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아마 마리우스라는 인물 자체가 엄청난 무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폭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감각해서 그가 집권하던 긴 시간동안 정치폭력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간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마리우스는 이후에 로마 공화정 최초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집정관을 한번 더 하기도 한다.


5.     동맹시 전쟁의 시작과 마리우스의 부활…?

그렇게 드루수스가 암살당하고 나서 로마는 합법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 만약 이탈리아 동맹시 전체에 로마 시민권이 확대됐다면 그것으로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맹시들은 아스쿨룸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쉽게 말해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라고 할 수 있는 라티움과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캄파니아와 기타 해안도시들을 제외한 전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이탈리아 공화국”을 건국하고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면서 독립을 선언한다.

처음 로마는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이러한 이유에는 당시까지 마리우스만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집정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매년 선거하는 투표제도 하에서 군사적으로 재능있는 집정관이 당선되는 것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은 일이었다. 또한 그나마 마리우스가 유능한 군사령관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원로원은 그를 중용해서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는 것에 인색했으며 현직 집정관 필리푸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직접 데리고 다니는 레가투스라는 “국방부 장관” 정도의 직책만을 얻었다. 심지어 푸루스는 마리우스가 “나는 군단병들을 훈련시킬 테니 집정관께선 동맹시들의 진격을 막으며 시간을 벌어달라”는 요청을 했음에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마리우스 보란듯이 진격했다가 패배하고 전사하고 만다.

그렇게 마리우스가 다시 최고 지휘관직에 오르지만,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라는 사람과 공동지휘관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묘하게 카이피도 역시 적의 유인지점에서 매복당해 전사한다. 그리고 로마는 마리우스의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과 수완에만 의존하며 간신히 전쟁을 버텨나갈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마리우스의 정치적 입지가 성장하는 것을 막을 것은 없었다. 곧 마리우스는 천재적인 지휘능력을 토대로 동맹시 군단병들을 분쇄하고 다녔으며, 곧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 될 술라와 함께 각각 북쪽과 남쪽을 정벌하면서 이름을 날린다. 

     하지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촌격인 루시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90년 집정관에 당선된 직후, 그라쿠스 형제 이후 약 40년을 끌어온 문제를 매듭짓는데 성공한다. 그는 모든 이탈리아 자유시민들에게 참정권과 로마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율리우스 법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동맹시 전쟁은 로마 시의 군사적 승리와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어떻게든 마무리되었고 이탈리아 반도가 로마라는 이름으로 통일된다.


6.     마리우스 vs 술라

이렇듯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마리우스에게 다시 한번 집정관 선거에 나서는 것은 군침 도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폰투스 전쟁 임페리움을 얻어 불후의 군사적 명성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술라와 갈등하게 되고, 술라는 연이은 행운과 군사적 재능으로 로마 최초의 종신독재관에 올라 그 악명높은 살생부를 만들어 이후 로마 공화국의 난세를 이끌어갈 영웅들의 길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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