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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Apr 03. 2024

3강 -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디그니타스

디그니타스, 클리엔텔라, 글로리아, 아욱토리타스

1.     저번 주에 못한 이야기 – 사투르니누스의 최후

저번에 발제를 다 해놓고 가장 중요한 사투르니누스의 최후를 언급하지 못하고 지나갔었습니다. 마무리를 하죠!

사투르니누스는 본인에게 걸맞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인기를 등에 업고 걸핏하면 신성한 원로원 회당과 호민관 집회에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돌팔매질을 하며 정적들을 찍어누르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특유의 처참한 정치감각으로 사투르니누스를 배신하죠.

우선 사투르니누스가 방치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마리우스 입장에서 사투르니누스를 지하감옥에 짱박아두거나 처형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리우스 나름대로는 원로원 의사당에 연금을 해두는 “타협된” 형태로 사투르니누스와 끄나풀들을 가둬둡니다.

하지만 사투르니누스와 추종자들은 원로원 의사당에 연금당한 상태에서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민중들은 옥상에 올라가서 옥상 기와들을 떼어내서 사투르니누스와 그 추종자들을 향해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결국 사투르니누스는 분노한 민중들의 돌팔매에 맞아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돌팔매로 흥한 자, 돌팔매로 죽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가이우스 라비리우스라는 청년이 저녁 만찬에서 사투르니누스의 목을 가지고 축구를 했다는 기록까지 존재합니다.

처음에 원로원의 신성한 정통성을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그라쿠스 형제도 그렇고 사투르니누스 역시 “원로원 최종 권고(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행동하다가 비명횡사를 합니다. 원로원이 신기한 것이, 물리적 힘이 실제로 있지도 않은 기관임과 동시에 계속해서 실권이 약해지는 기관임에도 원로원이 “임페리움”을 부여해주거나 공식적으로 추대해주는 정치인들은 운명의 여신이 돕는 것처럼 땅바닥에서도 승승장구하게 되며 사소한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하지만, 원로원이 최종 권고를 날리면서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사람은 갑자기 정치능력과 군사능력이 몰라볼 정도로 저하되거나, 엄청난 불운이 닥치거나, 끔찍한 배신을 당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운을 겪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원로원의 정통성을 인정해주거나 부여해주는 능력은 오늘 보여드릴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 나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지중해 세계 통일과 팍스 로마나 도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로마의 국가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SPQR의 의미가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디그니타스란?

그리고 드디어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을 배울 때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내전을 알아보기 위해서, 나아가 이후에 계속해서 펼쳐질 영웅들의 전투와 전쟁, 정치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그니타스”라는 개념도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클리엔텔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있는 지금이라도 디그니타스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디그니타스는 대략 영어로 “Dignity”, 즉 존엄성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디그니타스는 쉽게 말해 “개인이 쌓아올린 사회적 카리스마” 입니다. 디그니타스는 부족이나 정치파벌 단위로 성립하지 않으며, 오로지 특정 개인의 정치적 커리어, 능력, 카리스마에 대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디그니타스는 로마 사회가 가지고 있던 개인주의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명문 귀족 가문이고, 크라수스가 로마에서 제일 가는 부자이고, 키케로가 뛰어난 웅변가이자 법률가라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면서 정치력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개인 그 자체에 의해 드러낼 수 있는 “커리어”를 쌓아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디그니타스를 충분히 쌓아올려 위엄과 권위,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제서야 위대한 정치인이자 집정관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정치판에서 살아남고 성장하고자 한다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어떠한 업적 내지 커리어를 쌓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그니타스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확보할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인정받아온 개념들이 있습니다. 3가지를 말해보자면, 각각 클리엔텔라, 글로리아, 아욱토리타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글로리아는 소위 말하는 “임페리움”과 직결되는 개념이며 오늘 중요하게 다룰 개념이기도 합니다.

클리엔텔라부터 말해봅시다. 만약 내가 거느리고 있는 클리엔테스들이 무수히 많고, 또한 이들이 각가 다른 영향력 있는 부족이나 집단들을 대표하고 있으며, 나아가 유력 정치인이나 부자들을 자신의 클리엔테스로 삼을 수만 있으면, 이들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디그니타스가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파벌”을 강력하게 확보할 수 있다면 자신의 디그니타스를 높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글로리아입니다. 글로리아는 쉽게 말해 군공입니다. 로마 사회는 상당히 상무적인 사회입니다. 따라서 적국으로부터 로마를 수호하거나 적국을 정복하는 등의 위대한 군공을 세운다면 자신의 글로리아가 드높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사회는 “개선식”이라는 행사를 “국가 공인”으로 개최하곤 했습니다. 아무리 군공이 많다고 해도 모든 군공들을 정량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따라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이 사람은 위대한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라고 인정하는 전통을 만들어낸다면 글로리아를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정리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선장군”이 되는 것과 단순한 참전 군인으로 남는 것은 그 글로리아에 있어서 천양지차의 영향력을 낳게 됩니다. 아마 다다음주부터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할텐데, 이때 “개선식”의 권리를 둘러싸고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대립합니다.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자신의 글로리아를 국가적 차원으로 공인받는 것이며, 따라서 그 어떠한 글로리아보다 디그니타스를 더욱 영광스럽게 드높입니다.

다음으로 아욱토리타스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키케로가 아욱토리타스에 대해 한 말이 있습니다. “권력(포테스타스)이란 사람들 속에 있지만, 권위(아욱토리타스)는 원로원과 함께 있다.” 여기서 아욱토리타스가 보장하는 권위란, 쉽게 말해 로마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관직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법적인 권위입니다. 만약 내가 법무관이 된다면, 법무관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마땅한 아욱토리타스는 자신의 재량 하에 행사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욱토리타스는 전통과 법에 의해 수호받으며,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만약 내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제사장)이 된다면, 나는 로마 사회를 대표하는 사제로서 국영 신전들을 돌보고 대표함과 동시에 일종의 지시나 명령을 할 수 있는 아욱토리타스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욱토리타스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정치인이 어떤 관직에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감투가 위엄을 만든다는 말을 붙여볼 수 있겠군요.

그리고 디그니타스는 이들 외에도 수없이 많은 정치력, 계획, 음모, 돈칠 등으로도 확보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사회는 위 3가지 개념을 가장 중시했으며, 사회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은 사람들이라면 디그니타스를 드높이기 위해 클리엔텔라, 글로리아, 아욱토리타스를 교묘하고 현명하게 활용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디그니타스를 “집정관 선거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 영향력” 정도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어느정도 맞긴 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공화정 후기가 되면 이러한 의미가 조금 변화합니다. 특히 1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어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동맹을 맺어 원로원 정치체제를 국정농단하기 시작하면 집정관 따위를 했다고 해서 로마 최고의 권력자가 됐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부터 디그니타스는 “집정관 그 이상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한 사회적 영향력”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3.     임페리움을 둘러싼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1)     어부지리를 노린 폰투스의 궐기

“이 시대에 대해서 유일하게 방대한 자료는 아피아누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저서들 뿐이다. … 플루타르코스의 마리우스와 술라의 전기는 각별히 중요하며, …” – 하이켈하임


당시 로마는 내부와 외부 양면으로부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상태였습니다. 내부에서는 동맹시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며, 외부에서는 터키지방의 폰투스 왕국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의 동로마 식민지들을 빼앗기 위해 궐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는 동맹시 전쟁과 식민지 속주 총독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로 빚어진 민중반란에 직면하고 있었기에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이 기회는 군침이 도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궐기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식민 속주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형식으로 다양한 왕들을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나라 중 하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성애 설화와 이어지는 비티니아 왕국입니다. 원로원은 아퀼리우스를 특사로 보내 동로마 지역의 다양한 식민지들을 설득했고, 그 과정에서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3세를 왕으로 앉혔으며 폰투스에게 이를 인정할 것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결국 폰투스는 이러한 도발에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정복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아나톨리아 반도사 폰투스의 손에 떨어졌으며 로마 총독들이 끔찍한 착취에 시달리던 그리스의 다양한 속주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일어섰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는 “아테니온”과 “아리스티온”이라는 철학자들의 주도로 친로마 정부를 타도하고 폰투스와 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그리스는 철학자들의 영향력이 강력했나봅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출신 상인, 관료, 시민들 약 8만이 학살당했다고 하며 델로스가 심각하게 약탈당해 파괴됐다고 하니, 로마로서는 내전의 소용돌이가 남긴 상처를 움켜쥔 채 폰투스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2)     마리우스와 술라의 악연

어느 집단을 가도 어딘지 자신과 부딪히는 사람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서 마리우스와 술라가 그런 관계였습니다다. 유구르타 전쟁 (튀니지 주변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인 누미디아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분쟁)시절부터 마리우스와 술라는 크고 작은 일로 계속해서 부딪혔습니다. 마리우스는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에 힘입어 유구르타 전쟁에서 유구르타 국왕 본인을 궁지에 결정적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에서 유구르티는 이웃 동맹국인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보쿠스 1세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지원을 요청하는 지경까지 이르는데, 그럼에도 마리우스의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과 로마군의 전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하게 됩니다(심지어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전의 전투).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마리우스는 술라를 특사로 파견해서 유구르타의 몸을 넘겨주면 마우레타니아와 동맹을 맺고 전쟁을 종결하겠다고 협상을 합니다. 그렇게 술라는 유구르타 본인을 생포하는데 성공하게 되고, 갑자기 자신이 유구르타 본인을 생포했으며 전쟁의 1등 공신이라고 대대로 떠벌리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쉽게 말하면 “막타”를 먹은 것이죠.

이에 대해 마리우스는 대단히 불쾌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다 이겨놓은 전쟁에 술라라는 이상한 녀석이 숟가락만 얹어서 자신의 공로를 빼앗아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원로원은 마리우스가 영광을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 술라가 유구르타를 생포하고 전쟁을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을 인정해버리게 되고 술라의 편을 들어줍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는데, 사투르니누스가 꼴도 보기 싫었던 원로원이 장기집권중인 마리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술라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술라는 풀네임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인 만큼 최고 명문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술라는 현재 정치상황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귀족파를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할 수도 있겠노라 생각했으며 좀 더 적극적으로 마리우스의 속을 긁으면서 귀족파의 세력을 결집시킵니다.


3)     폰투스 원정 임페리움 갈등

저번 주에 배운 것처럼 마리우스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부활시키기를 욕망했습니다. 그리고 동맹시 전쟁에서 엄청난 글로리아를 이룬 마리우스는 곧이어 일어난 폰투스 전쟁에서도 활약함으로서 다시 한번 집정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정치상황도 전반적으로 마리우스에게 긍정적으로 흘러갔습니다. 마리우스는 평민파로서 처음부터 이탈리아 동맹시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주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맹시 전쟁 이후 이탈리아 동맹시들이 참정권을 실제로 얻게 되자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실제로 이러한 평민들의 지지는 마리우스가 술라에 쫓겨 떠돌아다닐 때 그의 목숨을 살려준 큰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마리우스의 저열할 정도로 덜떨어진 정치감각이 다시 한번 그의 미래를 어그러뜨립니다.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마리우스의 새로운 정치적 동지인 술피키우스 덕에 상당히 관대할 정도의 참정권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 로마 내부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고 마는데, 당시 현직 집정관이었떤 술라는 이때 평민파에 의해 거의 죽을 뻔합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몸을 피할 곳을 찾던 술라,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리우스의 저택으로 뛰어가 자기 좀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이게 왠걸, 결국 정치 바보 마리우스가 이때 술라를 살려주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노병을 대하는 것처럼 술라를 존중해주면서 살려줬다고 합니다. 여기서 술라는 마리우스에게 정계은퇴와 망명을 약속했던 것 같다고 전하는데, 술라는 이를 부정한다고 하지만 맥락상 맞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하지만 술라는 마리우스처럼 정치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술라는 마리우스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도망치게 해주자, 곧장 자신이 이끄는 군단병들이 주둔하고 있는 로마 인근에 있는 “놀라”라는 도시로 도망갑니다. 이 군단병들은 사전에 원로원이 현직 집정관이었떤 술라로 하여금 폰투스 원정을 수행할 수 있게끔 준비시킨 군단병들이었으며, 당연하지만 중무장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민회를 소집해 선을 넘어버리는데, 술라에게 부여되어있던 미트리다테스 원정 임페리움을 마리우스에게 넘겨주는 특별결의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원로원과 로마의 전통과 관습을 상당히 무시한 행위였습니다. 그 누구도 지금까지 현직 집정관의 군사 지휘권(임페리움)을 박탈한 적도 없었고, 아무런 관직도 없는 평민에게 이를 양도까지 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통수권자의 군통수권을 박탈하다니! 이 일로 기뻐하던 마리우스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비아냥댑니다.


“그는 마치 소년 같은 정열을 품은 채 전쟁에 출정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일 ‘마르스의 광장’으로 나가 젊은이들과 함께 몸을 단련하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날쌔게 달리며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등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

그러나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가 되고, 한낱 이름없는 몸에서 로마의 높은 영광을 누렸던 그가 이제는 가진 것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야 할텐데, 아직까지도 욕망과 야심을 버리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보고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늙고 노쇠한 그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지난날의 영광과 승리의 기념비를 내던지고 … 싸우려는지 의아해했다.”

그 말을 듣고 술라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로마 공화국 최초의 군사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군사 쿠데타가 가능했던 이유는 술라가 가지고 있던 군단병들이 동맹시 전쟁을 함께했던 군단병들이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군대의 사병화를 촉진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사병화와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술라가 현직 집정관이니 만큼 군단병들의 봉급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도 술라였을 것이며, 군통수권자이니 지휘관이나 병사들을 자신이 편제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4)     최초의 쿠데타

저번 주는 동맹시 전쟁으로 로마 최초의 내란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최초의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최초” 기록은 난세가 심화될수록 계속해서 갱신됩니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등 민중파는 술라의 쿠데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껏 현직 집정관이 자신이 지휘하는 군단병을 이끌고 로마를 점령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우스와 민중파는 곧 망명을 떠났으며, 술라는 운이 좋게도 마리우스의 무리수를 바로잡기 위해 로마에 입성한 장군의 이미지를 등에 업게 됩니다. 다시 한번 행운의 여신이 술라를 향해 미소를 지은 것이죠. 이에 술라는 원로원을 소집해 마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역적”으로 선포해내는데 합법적으로 성공했고 술라는 지체없이 폰투스 원정을 수행하기 위해 군단병들을 이끌고 동로마로 떠납니다.

반면 마리우스가 망명길에서 겪었던 고초를 읽어보면 아주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온갖 불행, 외면, 배고픔을 다 견디고 말 그대로 와신상담을 하면서 쿠데타의 의지를 다지는 그의 모습이라니. 뱃사람들이 바다에 떠다니는 그를 구하려고 건졌다가 마리우스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해변에 버려놓고 가기도 하고, 기병대의 추적을 따돌리고자 진흙 늪에 잠수하기도 하고, 가난한 목동들을 찾아가 먹을 것을 구걸하기도 하는 등. 하지만 대체로 평민들과 아프리카인들은 마리우스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마리우스는 귀족파와의 정치싸움에서 진 명문귀족 출신 현직 집정관 킨나, 탈출 노예들, 외국인 용병들을 긁어모아 로마로 진격할 준비를 합니다. 술라가 동로마로 원정을 떠난 틈을 노린 것이죠. 하지만 이는 쿠데타가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군단병들이 그에게 다시 한번 호응한 이유는 그가 평민파로서 쌓아온 커리어가 실제로 도움도 되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로마에 재입성한 다음 그 역시 술라를 창과 칼을 통해 “역적”으로 선포하는 등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치공작을 펼쳤으며, 현직 집정관인 술라가 원정을 떠나있는 사이 자신 스스로를 집정관으로 선포하여 7번째 집정관이 되는데 불법으로 성공한다. 그의 나이 71세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생명을 부활시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애달픈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자칭 집정관이 된 17일 만에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맙니다.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그는 어딘지 안타까운 노력파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굉장히 많은 노력과 함께 자신의 타고난 군사적 천재성을 발전시켰지만 말년운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죽기 7일 전에도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합니다.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더 이상 행운에 의지하지만은 않을거야!”


 이러한 발언이 가능했던 이유는 마리우스가 미천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는 평민 빈민출신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노력과 재능 끝에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술라와는 지극히 대조되는 발언인데, 술라는 대놓고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내게 행운을 가져다준 많은 결과들은 대부분 깊게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한 행동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영감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나는 전쟁을 위해서 보다는 행운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술라에 대해 다음과 평가합니다.


“술라는 신의 도움이나 행운이 따랐다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공을 운명의 여신에게로 돌렸다.”


아무튼 다시 한번 정치계에 복귀하고자 엄청나게 노력했던 그였지만, 죽기 직전에는 완전히 미쳐버린 탓에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하는 시늉을 하거나 군대에 호령을 하거나 실제로 싸움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고도 전합니다. 로마 최고 권력자이자 인류사에 군제개혁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 치고는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다음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기억도 짧고 생각도 깊지 못한 사람들은 지난 일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 묻어버리고 만다. 단 한 가지도 기억 속에 담아두지 못한 그들은, 오로지 앞날의 한 줄기 행운만 꿈꾼 나머지 자기의 손에 쥐어져 있는 현재는 외면하고 만다. 그러나 미래라는 것은 운명에 따라 빼앗길 염려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현재 운명이 주는 것도 바람에 내던져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만을 쫓으려고 한다. … 이것(지성을 개발해서 삶에 만족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기초가 되지 않고는 자기가 꿈꾸는 끝없는 욕망은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끝내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는 당시 시인 에우리피데스가 마리우스에 대해 했던 발언도 “술라”편에서 합니다.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야심이다. 그래서 야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겐 가장 무서운 불행이 뒤따르는 법이다.”


앞서 말했듯 술라는 로마 원로원이 폰투스 정벌을 위한 임페리움을 부여받아 “놀라”라는 곳으로 원정부대를 파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리스의 반란 속주들을 순서대로 정복해나갔으며, “카이로네이라”라는 곳에서 폰투스군을 크게 격파합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폰투스군이 11만명이나 전사한 반면 로마군은 12명만 전사했다고 기록합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으로 전투 내용을 보면 기가막히기 짝이 없는데, 폰투스 군 사령관이었던 아르켈라우스는 본인들 주력군인 팔랑크스가 진법을 펼치기 어려운 좁은 협곡에 진을 쳤다고 합니다. 술라는 이를 운 좋게 발견한 덕에 곧장 잘 무장된 군단병들을 몰고 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팔랑크스들을 몰살했다고 전합니다. 정말 그는 행운의 여신이 지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묘하게 원로원의 지지를 합법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온갖 행운과 공적을 연쇄적으로 누리게 되는 사례이기도 한 듯합니다.

하지만 술라는 마리우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깽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마당에 더 이상 폰투스에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폰투스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미트리다테스 6세와 휴전협정을 맺고 대충 짐을 싸고 로마로 귀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술라는 동맹시 전쟁부터 활약해온 백전노장들과 함께 어떻게 로마로 쳐들어갈지 전략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행운은 끝까지 술라의 편이었습니다.

술라가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우스가 병에 걸려 죽어버렸습니다. 가장 큰 적이 병으로 자기 혼자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이때부터 로마를 장악한 평민파들은 술라와 대적할 만한 군사경험이나 군공을 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료 집정관인 킨나가 끝까지 술라와 대적해서 싸우고자 노력은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킨나는 술라의 군대와 대적하기 위해 일리리아(발칸반도 서쪽)에 진을 키고 싶었던 것 같은데, 마리우스가 이끌던 군단병들은 지금이 겨울이라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가기 부적합하니 절대로 건너갈 수 없다는 식으로 “개기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그는 눈이 덮은 알프스라도 강행군으로 넘어가서 진을 쳐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킨나의 전술적 판단이 맞았는지 아니었는지는 누구도 모르겠지만, 킨나는 점점 군단병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백부장을 군단병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대놓고 모욕했다고 하며 그것에 반발심을 가진 마리우스의 군단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킨나를 구타해 살해했다고 전합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킨나는 손가락 반지를 백부장에게 건내며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면서 목숨을 구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약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경한 독재자를 벌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마리우스와 킨나의 죽음 역시 원로원의 반발을 사거나 원로원을 능멸하거나 모욕하는 이들이 결국에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그리고 술라는 킨나가 구타당해 사망한 직후에 이탈리아의 장화 끝인 브룬디시움에 상륙합니다. 더 이상 평민파를 이끌 정치적, 군사적 실력가가 없었으니 술라의 앞은 아피아 가도처럼 뻥 뚫린 고속도로였을 뿐입니다. 술라는 사소한 저항과 몇몇 군단병들을 격파하고 나서 곧장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고 그 스스로 종신독재관이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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