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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양댁 Feb 03. 2024

배려의 시험대, 임산부 핑크 배지



임신 테스트기로 두 줄이 뜨고 

아기집 및 난황이 보이기 시작하면 

산부인과에서는 

'임신 확인증'을 끊어준다. 

(간혹 심장 뛰는 소리를 확인해야만 

확인증을 주는 병원도 있다.) 



이 확인증 하나로 회사에 

단축 근무도 신청을 할 수도 있고 

보건소에 방문하면 

임산부 관련 영양제부터 

가방에 달고 다닐 수 있는

 '임산부 먼저' 핑크 배지를 받을 수 있다.  



핑크 배지의 제일 큰 용도는 

아무래도 대중교통 이용 시 

임산부 전용 좌석에 대한 배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 배지가 출퇴근 시

참 묘하게(?) 재미난 경험들을 

가져다주었다. 






육휴 쓰기 전까지 집에서 회사까지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는데.

 모든 칸에는 

두 좌석씩 임산부 배지와 

동일한 색상의 핑크색 좌석이 있었고, 

이를 '임산부 배려석'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중요한 거는 

'배려석'이지 '지정석'은 아니란 것이었다. 

(예전부터 좌석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임산부가 아닐 때는 

'핫핑크 색 좌석이 있구나'

 정도만 인지할 뿐 

별 관심이 없었다)






별난 성격상 

'나 임산부니 길을 비키시오!' 

이런 느낌조차 주기 싫어서 

배지 착용을 안 하고 다녔는데. 


배가 불러오고 나서부터는 

버거워진 출퇴근길에 

아기를 위해서라도 

앉아야겠다 싶어 

배지를 착용하며 

배려석이 있는 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9호선 지옥철을 이용해서 

출퇴근을 했던지라 

특히, 퇴근시간에는 배려석에 사람이

 대부분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누가' 앉아 있느냐에 따라 

그날의 희비가 엇갈린 적이 많았다. 






앉아 계셨던 분 유형에는 

크게 4가지가 있었다. 


같은 임산부, 


임산부가 오면 바로 비켜줄 심산으로 

앉아 계셨던 분들, 


그냥 앉았으니 '내 자리오!' 하시는 분들, 


(마지막분 유형분들이 제일 재미났는데) 

임산부가 온 것을 애써 

모른척하는 분들이었다.






같은 임산부가 앉아 있을 경우에는 

괜히 앞에 서있으면 부담을 느끼실까 봐 

원래부터 배려석에 관심 없었다는 듯 

타자마자 바로 옆 칸으로 이동했고. 


일반석에 앉으신 분들도 

얼마나 앉아서 가고 싶을까 하는 

마음이 생겨 몸이 그리 

힘들지 않을 때에는 

그냥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서 가곤 했다.




유형 2의 '임산부가 오면

 바로 비켜줄 심산으로 

앉아 계셨던 분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배지만 보고는 

벌떡 일어나셔서 자리를 비켜주셨고.


 '지정석'이 아닌 '배려석'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들의 '배려'를 보여주셔서 

편하게 앉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유형 3의 

'그냥 앉았으니 내 자리오 하는 분들'은 

주로 어르신분들이 많았는데. 


노약자석에 자리가 없어서 

밀려나셨겠거니 

생각이 들기도 했고 진짜 저분은 앉아서 

가시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나이가 

꽤 많이 드신 분들도 계셔서 별생각 없이 

앞에 서서 간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간혹 

그분들 옆자리에 앉아계신 

일반석 분들이

 감사하게도 

자리를 비켜주실 때가 

많아서 결국에는 앉아서 갔다)




마지막 유형의 분들이 꽤 재미났는데.

 '임산부가 온 것을 

애써 모른척하는 분들'. 


더 적확히 표현하자면

 '임산부가 온 것을 애써 모른척하다가 

나중에야 '이제 발견했다!'라며

크게 놀란 척 연기하는 분들'이었다. 



차라리 '배려석'일뿐이니

당당하게 앉아서 가시지.


 일단 

놀라는 연기가 너무 티가 났고 

갑자기 너무 큰소리로 

그러시는 경우가 있으셔서 

당황한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다.

 (진짜 모르셨던 분들은 

아무 말 없이

 놀라서 일어나시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분은 

임산부 좌석에 앉아계셨던 

50대 초중반의 

중년 아줌마 한 분이셨는데. 



그녀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나와 배지를 번갈아 보시더니 

갑자기 눈을 감고 잠을 청하셨다. 


많이 힘드셨나 보다 생각하며

 그녀 앞에 서서 평소와 같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몇 정거장을 지났을까. 



무의식적으로 앞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눈길이 갔고. 

'실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던 

그녀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꾸욱-'


얼른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그녀.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웃겨서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참으며,


또 어떤 반응을 하실까 

궁금증이 생겨 휴대폰을 보던 

눈길을 거두고 

계속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한 번의 실눈을 더 뜨고 

질끈 액션을 보여주시더니 

갑자기 막 이제 잠에서 깨어 

나를 발견했다는 듯이 

큰소리로 '어머! 몰랐어요!!!' 

이러면서 일어서시지 않는가.




실눈 액션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큰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게 되었고. 



그 칸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 집중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실눈'의 그녀도 

임산부에 대한 '배려'를 

기꺼이 보여주셔서 감사했지만... 

뭔가 참 찜찜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임산부 배지'가 

임산부인 것을 알려주는 

단순한 표식이라고만 

생각을 했었는데 


저런 상황을 여러 번 겪고 나니 

어느새 이 배지는 

사람들을 배려의 시험대에 

서게 만드는 아이템이 된 것만 같았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안 하는 것도 

당연히 문제가 되지만

 사실 타인에게 '배려'를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 



그동안 나는 배려의 시험대에 서서 

얼마나 많은 '배려'를 베풀며 살아왔을까. 



그놈의 배지 하나가 

'배려'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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