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10분. 북적북적한 등굣길. 그 틈에 껴서 나도 걷는다. 가을이 되면서 애쓰는 아니 용쓰는 것 중 하나가 걷기 운동이다. 신발만 신고 나가 다리를 움직이면 되는 이 간단한 동작이 왜 자꾸 미뤄지는지. 코앞에 있는 이마트 에브리데이는 왜 번번이 차를 끌고 가는지. 생각 끝에 아이가 집을 나서는 8시 10분이 되면 만사 제쳐두고 뛰쳐나가기로 했다. 전날 묶어놓은 음식물 쓰레기 한 봉지를 챙겨서.
아파트 앞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다. 거기서 3분 거리에 중학교도 있으니 아침 8시가 넘으면 등교하는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엄마 손을 잡은 꼬맹이들부터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까지 바글바글하다. 그 틈바구니 속 유독 눈에 띄는 아이들. 하얀색 크록스 신발을 맞춰 신은 중학생 커플이다. 처음 이 둘을 보았을 때 남자아이는 두 팔로 여자아이를 크게 감싸 안은 채 걷고 있었다. 여자친구를 바라보면서 앞이 아닌 옆으로 걷는 모양새에 눈길이 갔다. 아이들 뒤에서 걷던 나는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아직 단지도 벗어나기 전인데? 얘네들 엄마 어디서 내려다보고 있는 거 아니야?' 괜스레 걱정이 되더라는. 남자아이는 횡단보도 앞에 이르러서야 팔을 풀었다. 갑자기 내 속이 시원해졌다. 여자아이를 안은채 꽃게처럼 옆으로 걷던 남자아이. 팔에 감싸져 종종종 걷던 여자아이. 보기 불편했나 보다. 역시 나는 꼰대인가. 아이들 모습이 낯설다.
며칠 뒤에도 손을 꼭 잡고 걷는 그때 그 아이들을 보았다. 하얀색 크록스 커플. 어쩌자고 그날은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볼에 입을 맞추는 모습까지 봐버렸는지. 평범하기 그지없는 누구 집 아들. 오종종한 눈코입에 안경을 쓴 어느 집 딸. 둘 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같이 생겼는데. 부모님은 알고 계시려나? 또다시 오지랖이 밀려온다. 헤어롤을 말고 거리를 활보하는 아이들까지는 가까스로 적응했는데, 공공장소에서 뽀뽀까지 하는 중학생 커플에 미간이 찌푸러진 나는 뼛속까지 꼰대인가 보다. 요즘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이성교제가 생경하다.
6학년인 딸아이는 주말에 종종 친한 여자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우르르 몰려나가 한참을 놀다 온다. 인생네컷을 찍고, 올리브영 구경을 하고, 오락실에서 펌프를 몇 판 띈 후 마라탕을 먹고 오는 정도의 소소한 일과다. 몇 주 전 여느 때처럼 알맞게 놀고 돌아온 아이가 현관에서부터 신발을 벗어던지며 나를 찾는다.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호들갑스럽다. 들어보니 오락실에서 모르는 남자아이가 느닷없이 쪽지와 음료수를 건네주곤 아무 말도 없이 갔다는 것. 쪽지에는 '너랑 친구하고 싶어'라는 문장과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연신 어이없다고 말하는 딸아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어라? 딸아이 표정이 요상하다. 입으로는 연신 어이없다고 말하면서도 표정은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묘하게 미소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자아이들이 너무 싫다고 말하던 딸아이였다. 왜 싫으냐 물으면 남자애들은 죄다 시끄럽고, 바보같이 군다고.(아들들아 미안;) 그러던 아이가 웃고 있다. 남자아이의 쪽지를 받고선. 쪽지를 받은 건 아이인데 엄마인 나의 기분이 이상하다. 혼을 내야 할지 모른 척을 해야 할지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부럽다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 엄마 때는 고등학교나 가야 있는 일인데 어쩌고 저쩌고, 절대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된다 알았냐 몰랐냐, 그런데 그 아이는 어떻게 생겼더냐 호감형이냐 아니냐 취조와 함께 라떼를 퍼부었다. 쪽지도 슬그머니 내 주머니로 가져왔다. 아이는 전화까지 해 볼 호기심은 아직 없는 듯 쪽지를 찾지도 않는다. 참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 몰라도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육아서나 교육서에서는 슬그머니 손을 떼었는데 최근에 읽은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 공교롭게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양육자가 곁에서 맴돌면서 모든 욕구를 채워주는 것보다 스스로 학습할 기회를 만들어 줄 때 자신의 신체예산을 더 잘 관리한다. 아이를 키울 때 커다란 어려움은 언제 들어가야 하고 언제 뒤로 물러나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리사 펠드먼 배럿,『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더퀘스트, 2021, p.87
육아서에서도 자주 봤던 이야기. 이게 뇌과학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이지. 스스로 학습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자기 주도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것이 부모 마음이지. 음음.. 알지 알지. 나도 그 정도는 알지.
허나 아이의 이성교제만큼은 자기 주도적으로 스스로 알아가도록 둘 수 없을 것 같다. 이 문제에서만큼은 위에서 인용한 책 내용처럼 언제 들어가야 하고 언제 뒤로 물러 나야 하는지 즉, 낄끼빠빠가 잘 될 것 같지가 않다. 아이가 남학생에게 받아 온 쪽지 한 장만으로도 마음이 콩닥콩닥. 한껏 깨어있는 엄마인척하더니 별거 아닌 쪽지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는 옛날 엄마가 맞나 보다.
도움이 될만한 책이나 자료가 있을까 인터넷을 기웃거리다 [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 연재 기사 중 이성친구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들에게 이성친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성을 가진 또래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배우고 생각을 교환하는 이성친구에 대한 경험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꼭 성인처럼 누구를 지정해 사귀지 않아도 교실 안에서 함께 토론하고, 운동하고, 웃고 떠들면서도 충분히 충족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많은 아이가 이성친구가 있는 상황. 그러니 자녀가 부모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상의할 수 있도록 평소 아이에게 '이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네가 잘 자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라는 메시지를 주어야 한단다. 이성친구를 사귀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에둘러 말하지 말고 2차 성징, 성적 충동, 임신 가능성,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하기 등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라고. 아이들에게 해주어야 할 여러 말 중 내게 특히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는 '너희 안에 성적 욕구를 절대 우습게 봐선 안된다는 것, 이성친구를 만나려면 패스트푸드점이나 공원처럼 확 트인 장소에서 만나라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 아빠 전화는 꼭 받으라는 것'이었다. 추상적인 말보다 구체적인 행동 팁이 실질적으로 와닿았다고나 할까. 중학교 2, 3학년만 되어도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하니 기억해 두어야겠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언젠가 닥칠(?) 아이의 이성교제는 여전히 고민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ㅠ)
새삼 하얀색 크록스 커플이 기특하다. 딱 막힌 공간이 아닌 확 트인, 사람들 많은 등굣길에서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으니. 그렇게 쭈~욱 열린 공간에서 건전한 이성교제를 하길 바란다는, 역시나 꼰대 같은 멘트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