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환불 안 되나요?
직업을 고른다는 건 연애 상대를 선택하는 일과 같다. 난 외모적으로 훌륭하진 않아도 성격 안 좋은 사람은 못 만나, 와 같은 자신만의 기준이 어느 회사를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도 존재한다. 나의 경우, 부모님이 좋아하는 상대를 만난 격이었다. 부모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엄친딸까지는 아니어도 “대학 졸업하자마자 철석같이 공무원 합격한 성실한 딸”이라는 자랑거리였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에는 엄마는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 안달인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니 말도 안 된다며 펄펄 뛰셨다. “그 남자(공무원), 집안 좋고 돈 잘 번다는데(안정적이고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데)” 뭐가 맘에 안 드냐는 거다. 물론 살다 보니, 윗사람 말 안 들으면 후회할 때가 분명 있긴 있다. 엄마의 우산 가져가란 잔소리를 안 들은 날, 꼭 쨍쨍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직업이란 것은 잘못 선택했다가는 비 한 번 맞는 정도와는 차원이 다른 찝찝함이 일상에 자리 잡게 된다는 걸 몰랐다. 출근하기도 전에 퇴근하고 싶어 지고, 주말은 1분 2초처럼 흘러가고 일에 대한 부담은 부지런히 자동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이상현상이 생긴다는 것도. 부모님의 걱정보다 더 무서운 ‘퇴사 문지기’는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라는 존재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쇼핑을 하고, 이 시발비용을 납부하기 위해 회사를 다녀야 하는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기도 한다. 또한 농민도 자급자족하기 힘든 세상에서, 먹고살려면 당연히 돈이 있어야 하니 처절하지만, 이 정도 어려움은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회사를 그만두든, 이별을 택하든, 주로 이 ‘참고 견뎌야 한다’는 지점에서 의견이 갈린다. 사람마다 인내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는 직업이면 가끔 불행해도 괜찮다, 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이는 수중에 얼마가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는지, ‘이건 못 참지’라고 말하는 건 어떤 것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MBTI 같은 검사도 이 모든 걸 압축해서 물어보는 테스트 중 하나다. 여유가 되면 유료로 상담사의 분석과 함께 TCI, CST 같은 검사를 받아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INFP 유형이 나왔는데, 단체, 조직생활에 최악인 성격 유형으로 어울리는 직업은 작가, 디자이너, 큐레이터 등 예술계통이었다.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대부분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도 대부분 그 아름다움을 담기 위함이라 나한테는 꽤 정확한 테스트 결과였다. DISC 검사부터 거의 모든 성격 유형 검사를 해봤는데 대부분 결과가 똑같았다. 이쯤 되면 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어떻게 공무원 생활을 10년째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다.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하다. 빈틈이 많은 내가 이 직업을 통해서 긴장하여 준비하고 계획을 지키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건 나를 성숙시킨 힘이었다. 몇 년이 흘러도 능숙해지지 못했고 에너지는 바닥이 났지만 나를 소생시킬 씨앗도 주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심리테스트는 단순히 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넘어 위안을 주었다. 빠진 나사를 찾아다니느라 바빴는데 나사 하나 없는 게 그냥 나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남보다 나에게 좀 더 관대할 것을, 조금 후회는 됐지만 이제라도 내 마음을 안아줄 수 있는 것으로 조금 더 멋진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아마 이별할 때처럼 이 직업을 그만두게 되는 날도 눈물이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같이 보낸 세월에 강산이 변했고 첫사랑처럼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려내면 남는 게 있을지 걱정이지만 다시 붙이진 않겠다고 다짐한다. 가위를 든 내 손에 들린 게 무모함만 있는 건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