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1 때 처음으로 알파벳을 배우며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였는데요, 1995년도는 제가 중2 시절이에요. 그러니까, 중2 때, 이런 책으로 막 한자가 섞여 나오고 정말 재미없게 생긴 이 책으로 저는 문법을 닳고 닳도록 배웠었나 봐요.
책이 정말 너덜너덜하네요. 무슨 펜을 썼는지 펜이 다 번져서 이제는 알아보기가 힘들어요. 필기를 할 때, 혹시라도 이십 년 이상 보관할 생각이 있다면 좋은 펜을 써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포스트잇의 성능은 실로 놀랍기도 합니다. 27년 된 포스트잇은 여전히 단단히 잘 붙어있습니다. 한번 떼어보고 싶었지만, 혹여나 지금 떼면 접착력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릴까 두려워 그대로 둡니다.
성문기본영어(중학생시절추억소환)
이런 방식의 문법 교육을 언어교육분야에서는 전문용어로 GTM 방식이라고 해요. (Grammar Translation Method)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고, 호불호, 장단점이 정말 명확한 방법이기도 하여 요즘은 인덕티브웨이 오브 티칭으로 많이 넘어가서, 사실상 거의 보기 드문 티칭 기법이기도 합니다만...
솔직히 (여기서부터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것만큼 재미없기도 쉽지 않지만 효과가 직방인 것도 없는 것 같단 생각도 들어요. 일단 너무 명확해서, 수학이랑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공식에 맞춰 끼워 넣어 답을 풀어 맞추는 수학의 희열을 영어에서 조금 누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거요.^^
성문기본영어(중학생시절추억소환)
중학교 2학년의 당시 저에게, 너 참 애썼구나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이번에는 성문 종합영어예요.
성문종합영어(고등학생시절추억소환)
두께도 두 배 이상 두껍고 문제집 안에 문제가 확실히 더 많네요.
성문종합영어(고등학생시절추억소환)
성문종합영어(고등학생시절추억소환)
성문종합영어(고등학생시절추억소환)
뭔가 중학생 때와 달리 고등학생이 된 예전 저의 필기가 좀 더 여유로워 보여요. 여백을 사용하는 점도 중학교 때에 비하여 조금 더 세련되어진 것 같고요.
두께는 이렇게나 차이가 나요.
성문기본영어, 성문종합영어
책에서 오랜 세월의 곰팡이 냄새가 나고 종이는 눅눅하네요. 이제는 정말 버리려고 해요. 버리기 전에 아쉬워서 사진으로 남기며 한 시절을 지나간 영어에 관한 단상을 나누어 봅니다.
<영문법과 성경의 이상한 상관관계>
언어는 내게 있어 늘 아름다운 미지의 영역이었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탐해도 닿을 수 없어 애가 타는 영역이기도 했다. 모국어도 그러하지만, 외국어 특히 영어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멀티 페르소나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기도 했다. 그런 영어를 접하며 만난 교과서, 영문법을 떠올리며 겹쳐지는 것은 신기하게도 성경이었다. 영어 교과서와 성경, 이 둘이 내 마음에 들어와 어떤 반응을 일으킨 것일까?
나는 영어 교과서를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모두가 시험과 실력은 별도다, 교과서 속 문장은 인위적이라 실용적이지 않다 등의 말을 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 교과서는 늘 말이 많은 것 같다. 7080 학창 시절 교과서조차도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와중에 교과서와 영문법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나는 소수자에 속했다. 심지어 문법 번역식 교수 법인 GTM(Grammar Translation Method)의 문장도 '명료하다'라는 이유로 사랑했다. 'I am a boy. You are a girl.'의 문장이 실제 회화에서 쓰이지 않는 구문, 즉 구문을 위한 인위적인 작문이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바보스러운 말이 짧고 직관적이고 무엇이든 적용해 넣을 수 있는 만능 문구치고 좀 장이었다는 사실이었을 뿐.
언제더라, 학교에서 가정법을 배울 때 과거형 were를 쓴다고 배웠다. If I were a bird, ~~(만약 내가 새라면) 구문이다. 여기에는 가정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 불가능한 것들에서'라는 조항이 붙는다.
I was 도 아니고 I were라니 정말 바보 같지 아니한가? 게다가 발음도 [이 f 아이 월 어~]이니 대응이 많이 들어간 한국어 발음처럼 아기가 웅얼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실이 실없이 느껴져서 수업 중, 끝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 너 왜 웃어?' 하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조차 할 수도 없어 고개를 숙인 채 킥킥거렸다. 그날 이후 나는 가정법을 만날 때마다 알 수 없는 마음의 위안을 얻곤 했다.
왠지 바보 같은 If I were 어쩌고를 해도 실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이었다. 아니면 정말 될 수 없는 것들을 상상할 때는 문법적으로도 이렇게 되지도 않는 말을 쓰는 것이 주는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실제 이렇게 이상한 듯 뭔가 잘못된 듯싶은 것들이 관용화 된 것에서 '삶'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살이 다 비슷하구나.', '어차피 되지 못할 거 상상이라도 내 멋대로 하자.'
뭐 이런 반항심 같은 마음까지도 투영되어 문법을 배우는 짜릿한 쾌감도 있었다.
"삼각함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공식과 등식들에서 나는 위안을 찾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그 정리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직각을 포함한 세 개의 점이 가진 성격을 언제나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내가 아는 물리학은 모두 폐철 처리장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곳에서 배운 물리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웠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물리의 세계에서는 삶의 여러 차원을 정의하고 포착할 수 있는 원칙이 있었다. 어쩌면 현실이 모두 변화무쌍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현실도 설명과 예측이 가능할지 몰랐다. 어쩌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p.202>
타라 웨스트오버의 삼각함수가 삶의 여러 차원을 정의하고 포착할 수 있었듯, 내게는 언어의 문법이 주는 안정감이 존재했다. 외국어를 접할 때,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 ' 이 나라 법은 이러합니다. 이런 것은 지키셔야 하고, 이런 것은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변해서 큰일 나요. 이런 건 안 지키면 그만이긴 하지만 문화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하는 법과 규칙을 누군가에게서 미리 안내받고 준비된 자세로 임할 수 있었다.
물론, 살아가면서 부딪히며 체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소심하고 불안을 회피하는 성향의 사람인 나에게는 스스로 알아가는 불확실함과 확실함 사이의 도전이 늘 두려웠다. 혹시 내가 잘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컸다. 차라리, 아예 '법. 몇 조 몇 항에 이렇게 하라 쓰여있으니 지켜라.'라고 명확히 말해주는 걸 선호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경계가 모호한 영역들은 결국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회에서도 언어에서도 과학에서든. 하지만,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는 게 안정감과 위로를 주었고, 그렇기에 영문법이 싫지 않았다.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는 EFL 환경이므로, 모국어와는 다를 수밖에 없음 또한 쿨하게 인정한다. 실제 사용과 괴리감이 있다는 오명을 듣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영문법은 설렘이자 위로였고, 심지어 응원의 영역이었다.
'까짓것, 시험을 위한 영어면 어때. 나중에 안 쓰면 어때.'
이런 마음이 작동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저 순수하게 좋아서 커다란 문법책을 성경 책처럼 모시고 들고 다녔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의 영문법이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실제 입시와 실생활 영어와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즐겁고 좋다면야, 괴리감을 엄청난 시행착오를 향후 겪더라도, 기꺼이 겪을 것이고 기어코 그 강을 건너고 말 것이라는 사실 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고 각자가 맞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모두가 필연적으로 겪는 시행착오의 구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건너뛰고는 결코 편하게 공짜로 강을 건널 수는 없을 테니까. 뚫고 나간 그 힘은 '쓸데없다.'는 말로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저력이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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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게 더 이상의 필요가 없어진 도톰한 파란색 <성문 종합 영문법> 책. 그 책이 사라진 자리에는 대신 성경이 자리를 잡았다. 성당을 그리 오랜 시간을 다녔으면서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최근 신약성경 통독을 하며 알게 되었다. 이는 꼭 고등학교 시절 <수학의 정석>을 보는 듯했다. 정석 1장 '집합' 부분이 새까맣고 나머지는 깨끗하듯, 성경은 구약 창세기와 탈출기만 까맣게 손 떼가 묻어있었다.
요즘 첫째의 첫 영성체 교육을 위한 부모 성경통독을 하고 있다. 신약성경을 죽죽 읽어나간다. 수난 부분을 읽으며 오감 묘사가 없어 정말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전달만으로도 이토록 아픈 글이 나올 수 있구나 새삼 깨닫는다. 만약, 그 부분이 묘사로 쓰였다면, 사실이 아닌 느낌으로 기록되었다면 나는 끝내 읽지 못했을 터. 잔혹하디 잔혹한 인류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성경이 주는 위안으로 하늘나라의 법을 단연코 빼놓을 수 없다. 흔히 이 세계에서 우리가 귀하다 여기는 것들과 정반대의 가치들이 각광받는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1>
그곳에서는 가난한 자, 아픈 자, 슬픈 자들이 웃는다. 모든 것이 반대가 되는 세상. 사후세계가 주는 커다란 위안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 가정법,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에 실제로 잘못된 문법을 쓰는 것. 영어의 가정법이 주는 위로가 성경에서는 하느님 나라였다.
또한, 성경에는 혀 꼬여 가며 읽어야 하는, 줄줄이 이어지는 어려운 이름들이 나온다.
'왜 남의 족보를 이렇게나 세세히 읽어야 하는가? 이것은 히브리어 텅 트위스터 (tongue twister:유연한 발음 연습을 위한 언어 drilling의 한 방법) 인가?'' 싶다가 문득 내 안의 목소리를 만났다.
' 나 누구는 배우자 누구를 만나 딸 누구와 아들 누구를 낳았다.'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 긴긴 성경의 이름 안에 우리의 이름도 포함된 것이라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에 수많은 별처럼 우리가 실제 존재한다고. 나의 부모님도. 나의 자식들도. 우리가 이 생에서 만난 인연이 끝난 후, 저 생으로 넘어가더라도 결국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의 끈이 될 거라고.
여전히 내게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이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여전히 나는 자식 없는 이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혹시 끔찍한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어쩌면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다시 하늘에서 만날 수 있기에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생각이 이 즈음 머물렀을 때, 눈물에 번져 글자가 울렁였다. 읽기 어려운 이름들을 읽다 끝내 나는 빌어먹을 민감한 감수성을 탓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안심인가! 우리가 결국 다 같이 하느님 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이 말이다. If I were처럼, 어긋난 것이 맞는 세상, 세상의 가치 너머의 가치가 맞는 세상, 그곳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 삶의 여러 차원의 겹겹이 고비들을 뚫고 살아갈 힘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안다. 아무리 회화 위주의 영어 인풋을 얻는다 한들, 궁극적으로 영어에서 문법을 배우지 못하면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아무리 표현을 외우고 내 것으로 만든다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외국어로서 접하는 언어는 명시적인 방법에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경을 모른 채, 경험으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다 하여도 언젠가는 한계의 턱에 다다르겠지. 결국, 명시적인 방법에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사에 독서가 있고 강론이 있으며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말씀으로 산다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로소, 마흔이 한참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제대로 신약성경을 훑으며, 더 늦지 않아 다행이다 여긴다. 통독을 하며 사유가 머무는 중간중간, 만나게 될 삶과 통찰이 더없이 기대되는 밤이기도 하다. 또한, 영어 교과서와 성경 사이의 수상한 상관관계를 찾아 헤맸던 꽤나 즐거운 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