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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운 Aug 19. 2021

90년생 이야기

제주도로 도망간 백수,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



카페 투어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는 걸 보니 어제 마라도와 가파도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부터 비가 온 것은 제주에 와서 두 번째. 날씨 운이 좋아서 어떻게 비 오는 날 읽으려고 가져온 책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머쓱)


 벌써 돌아가는 날 제외하고 3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내 한 달 살기의 마침표를 찍을 마지막 숙소로 옮기는 날. 체크 아웃을 하고 전에 갔던 위미의 EPL 카페에서의 브런치로 하루를 시작한다.


여유로운 아침


 이른 시간 갓 구운 빵 냄새와 조용한 정원에서의 빗소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더 열심히 돌아다니거나 뭔가를 하기보단 그냥 좋았던 것들을 이렇게 더 느끼고 가고 싶다.


 아직 비가 많이 오지는 않지만 해 한점 안 보이는 먹구름 낀 하늘을 보니 어디 돌아다닐 계획을 세울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그냥 책만 읽자. 예쁜 카페에서 커피와 비 오는 창밖을 보며 책만 읽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리고 이제 슬슬 돌아가서 시차 적응도 해야 되니까. (제주시 - 인천시)


 책을 읽다 보니 비 오는 날씨에 어디 가지 못하고 카페로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노트북을 하나씩 들고 열심히 뭔가 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너무 멋있다. 사무실보다는 저런 분위기에서 일하는 게 창의적인 일을 한다면 훨씬 도움이 될 거 같긴 하다.


 책장을 넘기다 나에게 필요한 문장을 발견했다. 나는 자기 전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누가 죽는 장면이 나오면 내가 나중에 죽었을 때 느낌?처럼 깜깜하고 답답한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아무래도 공황장애 초기 증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 쉬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스트레스와 마음이 불안정해서 더 그랬을 수도 있는데, 최근엔 많이 좋아져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조금 답답한 정도? 그냥 죽는 게 무섭다고 해야 되나... 죽음 공포증? 같은 게 있었는데, 책에 이와 같은 내용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신경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나이가 들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일단 머리가 제정신이 아니게 돼서 그런 힘든 고통을 느낄 정도로 정상인 머리가 아니라는 것...


 먼 훗날의 죽음을 기다리는 비정상적인 몸 상태를 미리 걱정하며 지금 정상적인 몸을 학대하는 행위를 멈추고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불행 피하기 기술 中....-


 이 내용을 보고 나도 참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몇 년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했던 내용이 책 몇 장 읽은 것 덕분에 좋아지는 것도 참 신기했다.


 카페를 나와 다음 카페로 옮기기 위해 어디로 갈까 생각해보니 역시 김녕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숙소와 약 25분 거리밖에 되지 않기도 하고 책 읽기도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던 게 생각났다.


 비 오는 도로를 달려 김녕 쪼글락 카페에 도착했다. 비 오는 날이라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창가 자리는 모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난 조용한 뒷자리로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 자리가 나서 재빨리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가 자리 get


 

 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책장을 넘긴다. 빗소리를 들으니까 책이 더 잘 넘어가는 것 같다.


 천천히 반 정도 읽고 나니 슬슬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짧은 거리지만 차까지 뛰어가는데 온몸이 다 젖어 옆에 있는 비 오는 바다를 보며 에어컨 바람으로 몸을 말리다 숙소로 출발했다.






송당 별장


  이번에 예약한 숙소 송당 별장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전에 갔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좋은 기억이 있기도 했고, 마지막 숙소로 한 달 살기 하면서 느낀 점이나 팁들도 공유하며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마무리를 하고 싶었는데 유진 씨가 추천해 줬던 이곳이 생각나 바로 예약했다. (하루 묵었던 다른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곳을 많이 추천해줬다고 하셨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 맥주도 미리 사고 도착까지 순조로웠다. 문제는 차에서 내린 후....


 비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우산을 피는 게 아니었다. 그냥 맞고 갔어야 됐는데...

3초 컷.


 결국 캐리어와 짐 가방을 들고 비를 쫄딱 맞으며 게스트 하우스 입구까지 도착했다. 바로 앞에 택시를 타고 도착한 커플들도 우산이 망가져 나처럼 비를 쫄딱 맞으며 입구로 왔다. 인사를 나누고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선 묵묵부답... 사장님도 전화를 받지 않아 입구에서 비를 피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5분 정도 흘렀을 때 안에서 문이 열렸다. 비가 많이 와서 통신망이 이상한지 사장님은 전화가 안 왔다며 앞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주셨다고 했다.


 안에는 귀여운 말티즈 한 마리가 같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이름은 '루피' 송당 별장의 마스코트.


 사장님에게 간단한 설명과 인수인계를 받고 방을 안내받았다. 운 좋게 오늘은 4인실 예약한 사람이 나 뿐이라 혼자 4인실을 쓸 수 있었다.


 일단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거실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계신 여성 게스트분이 한분 계셨는데 장기로 오래 계시는 분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맥주를 먼저 깠다. 상쾌하게 샤워를 마치고 마시는 맥주 맛은 역시 일품이다.


이런 분위기랄까?

 

 혼자 맥주를 마시는 내가 궁금했던 건지 루피가 다가왔다. (나라도 있어준다~~ 하는 눈빛을 보내는 녀석)


 사장님은 맥주를 안 마신다고 했고, 커플 게스트분들도 방으로 들어가고 먼저 와 계셨던 게스트 분도 방에 계셔서 혼자 거실을 전세내고 편하게 마셨다.


 두 캔을 다 먹고 나서야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여 거실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커플로 오신 분은 결혼 2년 차 부부셨고 근처인 한라산 오를 예정이었는데 비 때문에 포기하고 내일 오전 비행기로 돌아가기 위해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로 오셨다고 했다.


 사장님을 제외한 세명의 여자 게스트 분들 중 두 분은 장기 투숙자였고, 한 분은 스텝으로 계신 분이었다. 신기는게 전에 있던 게스트 하우스 얘기를 하니 뭔가 표정의 변화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에서 일했다던 두 명의 스텝이 이곳의 스텝과 장기투숙으로 계셨던 것이다.


 그 온화환 미소의 사장님이 알고 보면 갑질의 끝판왕이어서 참다 참다 나왔다던 두 분의 하소연을 들으며 여기서 만난 게 참 신기하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스텝으로 계신 A분은 음악 관련 일을 한다고 하셨고, 장기 투숙하고 계신 B분은 대학 휴학하고 스텝으로 있다고 지금은 그냥 여행 중이라고 하셨고, C분은 글을 쓰고 있다고 하셨다.


 (특히 B분이 소개하면서 스무 살이라고 했을 때 모두 부러워 했다. 미리 나이를 알고 있던 사람들까지. 정말 부러운 나이다, 특히 어린 나이에 제주에서 스텝도 해보고.. 여러 경험을 해보는 그녀가 참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웃으며 떠들다 맥주도 한잔 들어가고 어쩌다 보니 미성년자는 들을 수 없는 29금 얘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궁금하면 5백원...) 


 수위가 꽤 쎄서 처음엔 놀랐지만 그래도 익숙해 져서 불편하지 않았다.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슬슬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정리하고 누운 잠자리도 편안하고 사람들도 좋아 보이는 게 참 괜찮은 곳이구나 하며 침대에 누웠다.


 침대도 불편하지 않고 참 괜찮았다. 잠이 솔솔 온다.


 며칠 남지 않은 제주에서의 더 좋은 일만 있길 바라며...


 마지막 숙소에서의 첫 번째 밤은 이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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