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도망간 백수,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
별 헤는 밤
혼자 쓰는 잠자리가 나쁘지 않았는데 일찍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일찍 일어나도 너무 일찍 일어났다.
전 날 밤늦게 다 같이 별 보러 가려고 했지만 구름이 많아 가지 못했던 게 생각나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밀어 본다.
현관 밖 정원에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이게 뭐지...? 별이 맞나? 할 정도로 많은 별들이 장관을 이루어 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런 풍경이었다. 저 넓은 하늘에 별들이 꼼꼼히 박혀 빛을 내는 모습이라니
제주에서 은하수를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해봤는데 숙소가 산 옆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이런 뜻밖의 행운을 만날 수 있었다.
정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으니 바람이 불어온다. 새벽시간 산 근처라 그런지 제법 쌀쌀하다. 풀내음을 맡으며 이 멋진 풍경을 내 눈에 담아둔다.
평소에 운이 좋은 편은 아닌데 제주에 와서는 못해본 구경도 많이 해보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좋은 일만 가득한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해가 뜰 때까지 이렇게 있고 싶지만 이 낭만을 방해하는 모기들과 얼마 남지 않은 제주 일정을 퀭한 상태도 돌아 다기는 그래서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D-2
다시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숙소는 조용하다. 물 한잔 마시고 샤워를 마친 후 전기면도기를 챙겨 현관문을 열었는데, 처음 보는 분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현관 옆에 계셔서 깜짝 놀랐다.
(서로 이 시간에 사람이 나올 줄 몰랐는지 둘 다 깜짝!!)
인사하고 어떻게 오셨냐고 물어보니 오늘 저녁부터 묵기로 한 게스트 분이셨는데, 방금 도착하셔서 짐만 맡기고 저녁에 체크인하려고 했지만 사장님이 전화를 안 받아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셨다.
곧 조식 시간이기도 했고, 사장님을 깨워 소개해 드린 후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짐을 들고 오셔서 같이 들어드리려고 했는데 금세 다 가지고 오셔서 머쓱...
사장님이 금방 조식을 차려주셨다. 어제 오신 부부 두분하고 나 셋만 먹게 되었는데
음... 솔직히 맛은 쏘쏘...? 입맛도 없어 많이 먹진 못했다.
두 분은 밥 먹고 바로 공항으로 가신다고 하셔서 서로 덕담을 주고받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얼마 남지 않은 제주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비밀의 숲
숙소에서 약 10분. 가까운 곳에 꽤 유명한 작은 숲이 있어 힐링을 위해 찾아갔다. 근처에 도착해보니 서귀포에서 제주시내 방향으로 한라산을 가로질러갈 때 보았던 큰 나무들이 있는 곳이었다. 꼭 가봐야지 했던 곳이 이곳이었구나, 떠나기 전 오게 돼서 참 다행이다.
작은 입구에서 입장료 2천 원을 내고 들어가면 눈앞에 바로 큰 나무들 사이 길이 보인다.
그곳으로 가다 보니 옆에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이 있어 명상하기 참 좋아 보였다. 이런 나무로 길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커플들이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거나 혼자 오신 분들이 지지대로 인생 샷을 찍고 있어 조심히 지나다녔다.
공기도 좋고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많지 않아 돌아다니기 참 좋았다. 비자림보단 작지만 훨씬 내가 생각했던 그론 힐링되는 숲에 적합했다. 천천히 구경하다 보니 가끔씩 나무 밑에 작은 보드판으로 글이 적혀 있는 게 보였다.
(그중 마음에 드는 문구가 보여 찰칵!)
천천히 한 바퀴 돌고 입구 쪽에 보였던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맑은 하늘과 높은 나무들... 참 좋은 곳이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해 준다 아직 이틀 뒤에 내가 다시 돌아간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길다면 길지만 막상 한 달 살기를 해보니 짧게만 느껴진다. 이 찰나와 같은 순간의 행복이 힘들 때마다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길....
모알보알
느낌 있는 카페다. 비밀의 숲을 나와 설리가 추천해줘서 간 카페였는데 프라이빗 한 공간에 카페가 있어 지인들과 주변 풍경을 보며 떠들기 좋아 보였다.
흔한 카페 느낌이 아니라 이곳만의 색깔이 있어 그게 너무 맘에 들었다. 바깥 자리는 꽉 차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 카페 입구에 오픈된 곳에 앉아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도 맛있네, 참 맘에 드는 곳이다. 사람 구경 바다 구경 실컷 하고 읽던 책을 펴고 집중하고 있으니 사장님이 오셔서 말을 거셨다.
혼자 왔냐고 물어보셔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카운터 쪽으로 가셔서 책을 몇 권 가져오시더니 여기 왔던 작가분이 혼자 오시는 분들 드리라고 책을 몇 권 두고 가셨다고 책을 주셨다.
(커피를 마시면 책을 주는 카페가 있다..!!???)
(근처에 있던 혼자 오신 여자분이 부럽다는 눈빛을 보내자 사장님이 그분도 나눠주심...ㅋㅋㅋ)
사장님께 너무 감사하다고 잘 읽겠다고 인사하며 카페가 너무 이쁘다고 말씀드리니 자주 듣는 말인지 쿨하게 그냥 지나가셨다.
책 읽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사람이 많아져 자리도 비켜 줄 겸 숙소에 가서 마저 읽기로 하고 일어난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함덕해변 서우봉 한번 더 들려 풍경 한번 더 봐주고 (이제 이 풍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 이 때부터 조금 돌아간다는 현실이 느껴졌다.) 근처에 피자가 맛있는 집이 있어 포장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사장님과 장기투숙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셔서 우선 나 혼자 피자에 맥주 한잔!
와 진짜 맛있다. 피자 클래스 함덕점... 잊지 않겠습니다... 치즈 폭탄으로 콤비네이션 윗부분을 덮어버린 진짜 미친 피자였다. (인생 피자 ㅇㅈ)
맥주랑 먹으니 배가 불러 세 조각 밖에 먹지 못했다. 남은 건 저녁에 게스트들이랑 나눠먹기로 하고 밖으로 나와 다시 책을 펼쳤다.
책이 술술 넘어간다. 한 달 살기의 최고 장점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조금의 사치...? 언제 또 제주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책만 읽고 있을 수 있을까 싶다.
한 권을 다 읽어 갈 때쯤 오늘을 같이 보낼 게스트들이 한 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날도 어둑어둑해져 자리를 정리하고 차에 의자를 다시 실어 넣고 숙소로 들어간다.
오늘 저녁도 별거 없이 즐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