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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도 Apr 16. 2021

‘유년기의 끝’에 서게 될 때

유년기의 끝 (Childhood’s End. 1953 아서 C. 클라크)

“He had laboured to take man to the stars, and now the stars - the aloof, indifferent stars - had come to him
(in chapter 1 of Childhood’s End)”
“라이놀트는 인류를 별에 도달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 막 그것을 성공하려는 찰나에, 별이 인류에게로 내려온 것이다. (유년기의 끝, 챕터 1 중)”
킨들 원서로 읽어본 유년기의 끝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최초의 접촉

소설은 거대한 우주선들이 전 세계의 상공을 뒤덮는 화려한 시퀀스와 함께, 외계 생명체의 ‘방문’ 그리고 그들과의 ‘조우’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컨셉은 영화 ‘인디펜던스데이 (Independence Day 1996)’부터 ‘컨택트 (Arrival 2006)’ 까지 내려져 오는 너무도 진부하고 뻔한 설정이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작품이 쓰인 시기가 1953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침략’이 아닌 ‘구원’을 위한 방문이라는 플롯은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몇십 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서부터 지구를 방문할 만큼 기술적으로 발전된 외계 생명체라면, 분명 영적으로도 고차원적인 존재일 것이기에, 무작정 침략하고 굴복시키기보단 보다 더 의미 있는 목적 하에 방문할 것이라는 거죠. 실로 개연성이 강한 플롯입니다. 특히,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를 적으로 상정하고 무찔러야 할 명분을 프로파간다로 내세우기 바빴던 냉전시대에 (1953년에 6.25 전쟁이 발발) 발표되었던 작품이기에, 이러한 방식의 조우는 굉장히 대담하며 더욱 의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SF 영화 내 클래식 소재, 미지와의 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








인류보완계획, 유년기의 끝, 그리고 스타차일드

‘오버로드’라고 명명되는 방문자들은 시종일관 드라이한 대사들만 이어가기에, 그들의 방문 목적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미스터리 한 의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한 세기를 훌쩍 넘어 인류의 진화 그 끝에 다다른 형태에 관한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유년기의 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미 잘 알려진 작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유명한 ‘인류보완계획’ 때문이지요. 에반게리온 내 '인류보완계획'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면, 유년기의 끝 저자 클라크경은 과학에 몰두하며 스스로 파멸되어가는 인류 역사의 현장(세계 2차 대전, 냉전시대)을 직접 경험하고,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 영적인 차원에서의 진화 및 도약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을 던졌던 에반게리온 내 ‘인류보완계획’의 실체



소설의 제목 ‘유년기의 끝’이라는 것은, 유년기 시절을 뒤로하고 다음 진화의 단계로 나아감을 뜻하기도 하지만, 진화의 끝에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종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일컫기도 합니다. 사실, 클라크경이 진화의 단계를 유년기의 형태로 표현한 작품은 비단 ‘유년기의 끝’ 뿐만이  아닙니다. 스탠리 큐브릭 영화의 원작으로도 유명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는 스타 차일드가 진화의 끝에 등장하지요. 이러한 작품들의 혼돈스러운 결말은  ‘니체’의 철학을 가져오면 이해하기 좀 더 쉬울 겁니다. 바로 니체가 말하는 ‘인간 정신의 3단계: 낙타-사자-어린아이’가 그 열쇠입니다.











초인; 위버멘쉬 그리고 어린아이

인간은 왜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져야 하는지 그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의 관습과 규범에 복종하며 인내하는 ‘낙타’의 삶에 서 시작하여, 그러한 기존의 관습과 규범에 맞설 수 있는 자유정신을 향한 ‘사자’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사자의 삶을 거치면, 마침내 삶 그 자체에 대해 초월할 수 있는 ‘어린아이’의 삶, 즉 위버멘쉬 (초인/초월인, Overman)가 된다는 것이지요.

지구를 바라보는 스타 차일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사실, 우리 인간 대부분은 ‘낙타’의 삶에 늘 머물러 있기에, ‘사자’를 삶의 단계 내 종착지로 두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사자’의 삶을 초인/위버멘쉬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소설 내, 초월 군주 ‘오버로드 (Overlord)’가 어쩌면 우리 인간이 그리는 ‘초인 (Overman)’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들의 강인한 육체와 생명력, 그리고 과학기술 진보의 끝에 다다른 문명은 진화가 이루어낼 수 있는 최종산물의 전형처럼 보이지요. 그렇기에 그들로부터 구원받아, 질병과 전쟁마저도 무색해진 인류의 세상은 분명 유토피아로 비칠 테고요.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오버로드’는 ‘사자’의 삶에 머물러 있는 종족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늘 ‘오버마인드 (Overmind)’의 수하라는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으며, 오버로드 또한 그들은 절대 오르지 못했으나 인류는 결국 헤내고만 최종 진화의 단계, ‘어린아이’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마침내 소설의 끝에서, 인류는 ‘사자’의 삶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종이자, 신인류가 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을 하나의 춤처럼 유희로서 승화시키는 진정한 ‘어린아이’로 거듭나며, 인간 정신 변화의 종착역에 다다른 것이지요.


오버로드(Overlord)가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인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학과 초자연현상 그 사이 어딘가

사실, ‘유년기의 끝’에서 그려진 인간 최종 진화의 모습; 영적인 차원에서의 초월이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이 소설이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일 것입니다. 클라크경은 본인의 소설 ‘유년기의 끝’을 ‘조우(encounter)’ 그리고 ‘초자연현상(paranormal activities)’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정의했습니다. 실제 아서 클라크는 런던의 명문대 킹스컬리지 런던 (King’s Colleage London)에서 물리학 및 수학을 전공하였으며, 1945년에 정지궤도 위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논문을 실었고 현재까지도 그 궤도를 ‘클라크 궤도’라고 부를 만큼, 그의 SF소설은 실질적 과학 디테일에 많은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과학이 결코 밝혀낼 수 없는 영적인 것, 보다 고차원적인 그 이상의 무언가에 대한 강한 신념을 생애 끝까지 견지한 듯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SF 소설은 과학과 초자연현상 사이에서 늘 화두를 던집니다.

영미 SF문학계의 3대 거장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SF작가, 아서 C.클라크. 그는 현대 과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미래학자이기도 했다.

소설은 과학기술의 진보에만 몰두한 나머지, 본인들이 ‘초자연현상’이라며 명명했음에도 그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그 무형의 힘을 한 번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 과학으로 증명되기 이전의 모든 것들이 ‘마법’과도 같았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아직 밝혀내지 못한 모든 것들을 과학으로 모두 밝혀내겠다는 인간의 포부는 어쩌면 지나친 오만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것이 지구를 벗어나 우주적 스케일이 되었을 때는, 과대망상으로까지 여겨질 수도 있을 테지요.


역으로, 클라크는 실제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인류가 과학적 진보의 끝에 다다랐을 때 궁극적 진화는 초자연적인 차원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직도 유년기에 머물러 있는, 아직 ‘낙타’의 삶도 채 끝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현 인류에게 이러한 영의 통합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의지에 반하는 부분입니다. ‘유년기의 끝’과 ‘에반게리온’의 결말이 우리 모두에게 서늘하고 충격적인 까닭이겠지요.

드라마 ‘유년기의 끝 (2015)’ 중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저서 ‘호모 사피엔스’의 마지막에 현재와 미래를 되짚으며 서늘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영생을 쫓고 있는 현재, 그리고 결국 인류는 그 목적마저 이룰 것이라는 미래.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행보를 걷고 있는 이들. 그렇게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이 역사의 조류에서 결국 사피엔스가 맞닥뜨리게 될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되고자 했던 '신'의 모습일까, 아니면 정말 인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게 될 새로운 '종'의 모습일까. ‘유년기’로 기억될 호모사피엔스를 뒤로 한 채, 인류는 그 유년기의 끝에서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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