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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Jun 07.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78. 나부터 살고 남도 살자

  한국이 동방예의지국이어서 그럴까요? 한국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걱정도 잘해주고 같이 고민도 해주고 내 일인 것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기도 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라는 표현은 이런 우리의 정서를 찰떡처럼 표현해 줍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인간의 선한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본능이  '나부터 살고 남도 살자'라는 원칙을 넘어서면 발생합니다. 연대보증을 잘못 서서 온 집안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 이야기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플롯입니다. 우리 집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내 명의로 대출을 내서 남에게 빌려주는 일도 아주 흔하고요. 이러한 행동의 밑에는 '남에게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거절하는 것이 미안해서'와 같은 이기적인 욕구가 깔려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대개는 부탁을 거절했을 때 '이기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가족이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나요? 얼마 전에 단요 작가의 '인버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작중 주인공이 자취할 때 쓰려고 모아 오피스텔 보증금을 사업에 급하게 써야 한다며 빌려달라고 하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딸이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하자 '효'와 '도리'를 운운합니다. 저는 주인공이 너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이미 숱하게 빌려주었고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딸이 돈이 아주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필요한 돈입니다. 하지만 '효'와 '도리'에 매여 그 돈을 빌려주었다면 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알코올 중독 환자분에서도 이런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병동에서 친하게 지내며 서로 잘 회복해 보자고 다짐하고 나가서 연락하자며 연락처를 주고받는데 나가면 둘 중 한쪽이 술에 취해서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입원하는 걸 도와준다'라고 만나러 나갔다가 결국 함께 마십니다. 그러면 두 분 모두 다시 치료를 받으러 올 때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지금은 어려울 것 같네. 미안하다.'라고 용기 내어 거절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기도 하면서 상대방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부터 사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이타적인 선택임을 꼭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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