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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Gunda, 2020

✔︎ 이병현 영화평론가(https://brunch.co.kr/@writeaurab#info)와 함께 한 해파리의 10월 영화, <군다>에 관한 영화글이 haepari.net에 업로드 되었습니다.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기 전까지_이병현


작중 돼지 ‘군다’가 살고 있는 곳은 노르웨이 베스트폴(Vestfold) 주 퇸스베르그(Tønsberg) 시에 위치한 그뢰스타드(Grøstad) 농장이다. 농장을 소개하는 한 기사1)에 따르면 이곳은 “2000년에 설립된 노르웨이 최고의 유기농 돼지고기 생산업체”로,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구멍’의 탄생비화도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농장에는 들판이 딸린 오래된 계사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에는 커다란 방 하나만 있었습니다. 농장 설립자들은 전기 톱을 이용해 벽에 구멍을 뚫고 돼지를 밖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지금껏 콘크리트와 타일의 냄새만 맡고 살던 돼지는 재빠르게 주둥이를 흙 속으로 찔러서 맛있는 음식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돼지”가 살고 있는 곳으로 표현되는 기사 속 농장에 대한 묘사는 영화 <군다>의 결말을 보고 난 관객에겐 다소 거리감 있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영화의 감독 역시 ‘군다’가 (상대적으로) ‘특권을 누리는’(privileged) 돼지라고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그뢰스타드 농장은 프랑스 혁명기에 발명된 장치인 단두대의 아이러니를 표상하고 있는 장소이다. ‘인도주의적 처형장치’라는 문장에 담긴 그 형용모순을.


영화는 이 형용모순적 돼지 농장을 돼지의 눈높이에 맞춰 낮게 엎드린 카메라로 찍는다. 비록 동물과 같은 높이에 있기는 하지만, 이 시선은 의외로 냉정하다. 유려한 솜씨로 움직이는 스테디캠은 영화 초반 진흙 구덩이에 처박혀 울부짖는 무녀리가 자기 어미인 군다의 앞발에 밟혀 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이것은 고의적인 살해로, 영화 <군다>가 <샬롯의 거미줄>이나 <꼬마 돼지 베이브> 같은 동화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하는 대목이다. 동시에 ‘군다’ 역시 고귀한 영웅이나 모성애를 지닌 어미로서 의인화되거나 타자화되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는 몸을 지닌 한 마리의 돼지, 그 자체로서의 군다로 제시될 뿐이다.



누락시킬 수도 있었던 부분을 공평하게 담으며 돼지와 닭을 차분히 따라가던 카메라가 유일하게 공평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소를 따라가는 부분이다. 슬로우 모션 효과를 섞어 소떼를 미학적으로 쫓아가던 카메라가 급기야 땅을 떠나 하늘에서 부감샷으로 소 한 마리를 찍을 때, 이것이 어떤 의도에 따른 결과물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여기에 대해서 일반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크레딧에 따르면 영화의 촬영장소는 “노르웨이, 스페인, 영국의 농장과 생추어리”이다. 기사2)에 따르면 제작자들은 구체적으로 스페인의 생추어리와 영국의 독립 농장에 방문했다고 밝혔는데, 외다리 닭과 소떼는 그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생추어리’는 동물 구조 및 보호 시설이므로, 농장 동물과는 달리 생추어리에 살고 있는 동물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즉 닭과 소는 ‘군다’의 자식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소를 유난히 부감샷까지 섞어가며 영화 전체의 톤에서 튀게 찍어 놓은 것은 이런 배경에 따른 과도한 미학적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리비아에 가까운 이런 영화 외적인 지식을 제외하면, 아무런 정보 없이 1시간 반 동안 이 영화를 볼 때 느껴지는 것은 이와는 다른 픽션적 결과물이다.



돼지와 소 사이, 닭을 찍을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화가 돼지와 닭이 마치 하나의 농장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관객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다리 닭이 홰치며 올라간 나무는 마치 후반부 군다가 새끼들에게 수유할 때 기대었던 나무와 같은 들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영화는 닭이 들판을 거닐다 철조망에 가로막혀, 틈새로 머리를 박아 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굳이 철조망 건너로 넘어가) 철조망 너머로 비치는 닭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는다. 닭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 촬영은 외다리 닭이 영국의 독립 농장에 구조되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뢰스퇴드 농장에서 여전히 사육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더해서 이 장면은 후반부 군다가 전기가 흐르는 울타리에 코를 부딪히고 비명을 지르는 모습, 즉 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가운데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그 중요한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연상작용에 따라 소떼 역시 이들과 같은 농장에 있는 것으로 관객은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이때 부감샷은 무엇을 뜻하게 될까? 나는 그 순간 이 장면이 영화의 초점화자가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즉 영화 속 카메라가 택한 위치가 안전하게 저 먼 하늘에서 인간을 가없이 지켜보는 신 마냥 동물을 가엾이 여기는 ‘신의 시점’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폭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관객은 결국 1시간 반 동안 돼지우리에서 뒹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극장 안에서 스크린을 지켜본 것에 불과하다.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1) https://meny.no/tema/matskatter/vestfold-telemark/Grostad/

2) https://www.latimes.com/entertainment-arts/awards/story/2021-01-04/gunda-documentary-pig-farm-animal-rights


카메라의 시선과 나의 시선_난둘


카메라는 길고 긴 호흡으로 돼지가 우리에서 자다 깨는 모습을 찍는다. 이후 등장하는 아기 돼지들. 카메라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 아기 돼지들이 열성적으로 젖을 빠는 모습을 찍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한 돼지가 본능적으로 젖을 빨러 간다. 아기 돼지들에게 둘러싸여 젖을 주고 있는 돼지는 건초를 먹는다. 아기 돼지들이 열성적으로 젖을 빠는 게 편안하지는 않다는 듯 여러 번 일어나고 자리를 바꾼다. 아기 돼지들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따라가 젖을 빤다. 카메라는 이토록 평화로운 광경을 그저 찍을 뿐이다.


카메라맨이 들어가 돼지들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우리. 이는 돼지고기로 사육되는 돼지들의 사육 환경과는 사뭇 다르다. 양돈 농가의 ‘산업 돼지’들은 태어날 때 이빨이 깎이고 꼬리가 잘린 채로 좁은 우리에서 110kg 이상으로 클 때까지 살찌워진다.1) 좁은 우리 안에서 서로를 상처 내지 못하도록 (모두 동물들로부터)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을 날카로운 이빨이 강제로 무뎌진 돼지들은 (주로 인간으로부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우리 안에 갇혀 채 1년도 지속되지 못할 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군다>의 카메라가 보통의 산업 돼지들이 처한 현실을 상기시키지는 않는다. 카메라는 바깥으로 나간 돼지들을 따라가는데, 이때 카메라가 집중하는 것은 무리에서 자꾸 벗어나는 아기 돼지다. 그 아기 돼지는 어찌 된 일인지 다리를 절뚝거려 다른 돼지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비인간 동물 사회에서 그 아기 돼지는 마냥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다. 역설적으로 인간 동물 사회에서 그 아기 돼지는 도망칠 우려가 적어 사육되기 쉬운 존재다. 도대체 <군다>의 카메라는 왜 이 아기 돼지에 집중한 것일까?


이는 닭들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한쪽 다리가 없는 닭을 집중적으로 따라간다. 그 닭은 무리 지어 다니는 닭들과 다르게 홀로 다닌다. 그 닭은 열심히 바깥을 돌아다니다 인위적으로 세워진 철조망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가지 못한다. 이 닭도 마찬가지다. 보통 닭을 지탱하는 다리는(그 닭 다리가 아니다) 먹지 않기 때문에 품질 저하라는 이유로 폐계 되지 않을 것이다. 비인간 동물 사회에서 동행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마냥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 동물 사회에서 사육되기 쉽다는 이유로 환영받는다.


그렇다고 <군다>가 이러한 역설을 강조하는가? 자꾸만 <군다>가 그저 ‘부족한 존재’를 포커싱 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저 그들을 바라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에 기시감이 든다. 영화는 무리에서 동떨어지는 존재를 따라가며 비인간 사회의 섭리에 대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비인간 동물들은 ‘도와주어야 할 존재’로 여겨지는 ‘부족한 존재’를 쉽게 도와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인간 동물 사회에서 더욱 잔혹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포식자로서 비인간 동물을 사육하고 살상하기, 자본주의 사회의 종속 자로서 열등한 존재를 간악한 방법으로 괴롭히기, 자기보다 약한 인간 동물에게 이루어지는 (성) 폭력 등…… 오히려 <군다>의 시선은 비인간 동물의 사회를 노스탤직하고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비인간 동물의 사회의 아래에 두는 듯하다.


 “그저 그들을 바라볼 뿐이야!”라고 외치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그 시선 자체인 스스로를 고급스럽게 포장하려는 <군다>라고 영화를 정의내리고만 싶어 하는 내 시선의 문제인 걸까.


 1) 이정규, 한겨레, “[현장] 고기가 될 돼지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현장] 고기가 될 돼지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hani.co.kr), 202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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