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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ケイコ 目を澄ませて, 2022, 미야케 쇼 


리듬의 삶 _ 난둘

복싱은 나의 리듬이 중요하다. 일견 복싱은 팔을 뻗는 운동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팔을 제대로 뻗기 위해 상체를 떠받치고 있는 하체의 움직임을 얼마나 잘 컨트롤하느냐가 복싱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일 것이다. 또한 복싱은 상대방에게 내 리듬을 맞추지 않고 내가 만들어 낸 리듬으로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운동이다. 케이코는 그만의 변칙적인 리듬을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운동한다.

케이코는 매일 줄넘기한다. 줄을 넘기는 일정한 움직임과 더불어 로드워크 10km, 섀도 3라운드, 미트 3라운드 이외에 추가되는 개인 훈련이 함께한다. 그 일정한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케이코 자신의 리듬은 하체를 컨트롤하는 필요조건이다. 이 시간은 케이코에게 잡생각 없이 운동이라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순간이기도 하겠지만, 다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감각을 일깨워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운동 이외의 일상 또한 반복된다. 대다수가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케이코는 대다수 사람보다 배로 예민하게 감각을 일깨워야 한다. 선천성 청각장애로 소리로 알아챌 수 없는 정보를 그 외의 감각으로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트 캐셔의 사소한 질문, 호텔 직원들의 질문, 지나치다 마주친 행인의 불평을 일일이 알아차리기 위해 그들을 ‘마주해야만’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의 입가에 씌워진 마스크는 예민한 케이코의 감각에 차가운 얼음 막을 덧씌웠을 것이다.

케이코는 ‘마주하는 것’이 힘든 사람이다. 복싱장 회장님에게 복싱을 당분간 쉬고 싶다는 편지를 쓰고도 확신이 없어 복싱장이 닫힐 때까지 전하지 못한다. 세이지가 힘든 점을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말해 봤자 결국 사람은 혼자야.” 케이코는 타인과의 물리적, 비물리적 접촉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행위에도 취약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예민한 감각의 반복을 침묵으로 견뎌 왔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감각의 반복을 누구보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케이코는 역설적으로 감각의 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복되고 감각적인 운동인 복싱을 선택했다. 케이코는 세이지가 복싱의 어떤 점이 좋냐는 질문에 “때리면 기분이 좋다”고 대답한다. 복싱에서 때리는 행위는 단순히 그 상대방을 가격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리듬을 읽고 그 리듬을 나의 리듬으로 흩트려 놓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리듬이 변칙적이어야 하고, 이러한 변칙적인 리듬이 링 위의 3분을 저항의 시간으로 만든다. 케이코는 그러한 순간이 좋은 것이다. 반복에서 나오는 일탈. 감각의 일탈. 

일탈은 반복이 없으면 나올 수 없다. 그렇지만 모두가 반복 없는 일탈을 꿈꾸고 케이코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삶을 마주하기 두렵기 때문이다. 여전히 들리지 않는 소리, 프로 복서가 되어도 달라지지 않는 호텔 청소부로서의 일상, 정체된 것만 같은 복싱 실력, 프로가 되었으니, 복싱을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냐는 주변의 만류, 언제나 비슷한 삶의 동선.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라는 케이코의 말은 지루한 삶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케이코는 지루한 반복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재개발과 회장님의 건강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된 복싱장을 떠나 새로운 복싱장 입단을 위해 복싱장에 발을 디뎠을 때, 자신이 다니던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복싱장과 달리 신식 기구로 단장된 장소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을 집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싫다는 어리광 같은 투정으로 무마하려 했을 때, 이는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케이코는 이때부터 자신이 누구보다 자신의 리듬을 사랑하고 있음을 조금씩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케이코는 두 달 뒤 다시 열린 복싱 시합에서 패한다. 상대방의 반칙에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리듬을 잃고 상대방의 리듬에 말려들어 갔다.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던 카운터를 맞아 쓰러지고 만다. 시합 후 케이코는 다시금 자신의 리듬을 반복되는 일상으로 다잡는다. 여느 때처럼 로드워크 10km를 뛰고 있을 때, 케이코는 자신을 이긴 상대방을 만난다. 그는 공사 현장 인부 같은 차림새를 하고 케이코에게 수화를 섞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나와 같이 자신만의 리듬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는 흔한 말. 그러나 그 흔한 말을 자신의 마음에 새기며 그곳을 들여다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케이코는 앞으로도 반복되는 삶에 싫증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케이코는 자기 삶에서 복싱을 만난 것처럼 자신만의 일탈을 찾아낼 것이며, 그 순간에 옆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살아갈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협응으로의 영화 _ A

협응이란 신체의 시지각 능력, 신경기관, 운동기관의 종합적 감각을 아우르는 것이다. 개별 요소의 각각이 조응하며 유기적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협응의 역량이다.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가로등의 고요한 깜빡임, 줄넘기가 마루바닥에 마찰하며 나는 소리, 체육관 낡은 머신의 쇠줄 소리, 글러브와 샌드백의 파열음이 리듬을 쌓아 올리며 시작되는 협응으로의 영화다. 영화는 16mm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필름 시대가 저물고, 이제 필름이라는 것은 할리우드 거장 감독의 영화적 성취에 관한 전유물 혹은 노스탤지어로 남아버린 시대에 먼지의 움직임까지 담아내는 필름의 노이즈와 공기감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케이코의 세계를 구성하며 빛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필름 시대의 영화가 필름과 영사기 그리고 빛과 어둠의 협응으로 스크린에 현현하게 되는 것처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필름의 질료적 성질로 숏과 숏, 몸짓과 몸짓, 사람과 사람, 공간과 사람, 현재와 과거, 새로운 것과 지나간 것의 개별 요소를 하나의 시퀀스로 현현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가령, 영화에서 디지털카메라(새로운 것)로 촬영된 경기 현장 사진은 움직이는 필름(지나간 것) 사이에 이미지로 고정된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의 선명함이 담아내는 것은 흔들리는 피사체와 잘못 설정된 노출값이다. 또한, 선천적 감음 난청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와 노화로 인해 병원 검진을 받고 영화 후반에는 휠체어를 탄 체육관 관장의 신체를 구조적으로 병치하는 것 역시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동시에 허문다. 비장애중심주의적인 세상에서 장애를 가진 몸은 비정상적인 신체로 치환되고는 하지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장애의 가능태를 장애에 중심을 두지 않고 저변에 둔다. 수화를 사용하는 케이코를 보여주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케이코와 남동생 세이지가 대화를 나눌 때,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에 사용되던 간자막을 차용한다. 직장 동료와의 수화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표준적인 가로 자막의 방식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수화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번역되지 않는 비전형적인 언어 패턴을 구성한다. 

필름 영화와 토키 영화를 거슬러 가는 이 시대착오적인 영화는 매체, 신체, 언어의 시차를 거슬러 하나의 프레임 내 두 신체의 나란한 움직임으로 놀라운 순간을 만들어 낸다. 같은 몸짓이 기계주의나 군사주의로 환원되지 않고, 온당하게 주고받아지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얼마나 오래간만이었던가. 콤비네이션 미트 훈련과 폐관을 앞두고 거울 앞에 선 코치 마코토와 케이코의 ‘권투 시퀀스’는 닮음으로 치환되지 않는 개별의 신비한 순간으로 그 장면 속에 있는 것이다. 이같은 시퀀스는 실제 세계에서 아무리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고 하더라도 대체로 실패해 버리는 언어와 언어의 협응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세계의 룰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무섭지만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맞서는 것, 상대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게임의 룰인 권투의 세계이다. 

아침을 알리는 핸드폰의 빛, 초인종을 대신하여 산란하는 빛, 머리 위에 쏟아지는 것처럼 번쩍이는 지하철의 빛, 이와 대비되는 신식 체육관의 눈부신 주광색과 케이코의 얼굴을 겨누는 경찰의 손전등. 감광지에 남은 빛의 자국이 세계의 감정, 감각, 운동에 반응하며 형상을 만들어내듯, 필름을 사용한 이 영화에서 빛은 표정만으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케이코와 재개발과 낙후로 사라져 가는 도시의 풍경을 현상한다. 

필름으로 기록되는 한 번의 권투 영화. 그리고 사라져가는 도쿄의 한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설명하지 않는 삶, 그 자체로 살아가는 삶에 관한 영화로, 이러한 영화를 보고 나면 인간을 다시금 사랑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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